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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Jul 31. 2017

<꿈의 제인> 리뷰

불행으로의 영원회귀

 <꿈의 제인>을 관통하는 핵심 명제는 ‘불행(unhappy)’이다. 불행이라는 이미지에는 ‘상실’이라는 이미지가 포개진다. 그러나 그 상실은 한때 지니고 있던 것을 어느 시점에서 빼앗긴 것이 아니다. 탯줄이 잘리는 순간 즉,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선언되는 일종의 형벌인 셈이다. 행복에 대한 끊임없는 결핍 속에서 불행은 그림자처럼 인간과 일체화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제인이 소현에게 ‘unhappy’라는 글귀가 적힌 스탬프를 찍어주는 씬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는 관객들에게 ‘아 맞다. 삶은 원래 불행한 것이었지’라고 깨닫게 한다. 가슴 벅차고 따듯한 행복의 순간들은 한순간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정 속에서 ‘unhappy’는 영화 <인셉션>의 토템처럼 현실과 꿈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난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쭈욱 이어지는 기분? 그런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라는 대사는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불행의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한다. 언급한 대사와 연기를 포함해 △캐릭터 △로케이션 △명암 △촬영기법 △프레임 속 배치 △전개 구조는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불행의 형상을 충실하게 지탱한다. 세상에서 소외된 삶을 사는 이들만이 그려낼 수 있는 참담한 삶의 모습들은 스크린 속에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불편할 수밖에 없다. 불가분 관계인 ‘삶’과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당신들 역시,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불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불행의 시선에서 조망하는 <꿈의 제인>이 끝끝내 어떤 모습인지는 글을 쓰는 나로서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꿈의 제인> 속 대사를 빌어 한 마디하고 싶다. 이 글을 다 읽어 내려가는 순간까지 ‘우리 같이, 불행해지자’. 


*아래의 글에서 인용하는 <꿈의 제인>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는 2017년 5월 31일에 진행된 <꿈의 제인> 시네마톡에서 차용한 것이다.


캐릭터 유형과 설정이 전하는 불행의 서사

 트랜스젠더인 제인과 소현을 비롯한 가출청소년들이 캐릭터 유형의 전부인 것만으로도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유추해낼 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삶을 살고 있다. 일반적인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조현훈 감독은 이러한 캐릭터들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현실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말할 기회가 없는 인물들에게 입을 빌려줘야겠다 싶어 작업을 시작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주축이 되는 것은 트랜스젠더인 제인이 아니라, 가출청소년인 소현이다. 제인은 영화의 제목처럼 소현에게 잠시 스쳐가는 ‘꿈’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제인을 통해 트랜스젠더가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불행을 자세하게 관찰하기는 어렵다. 관객은 소현의 시선을 줄곧 쫓으며 가출청소년들이 느끼는 불안감이나, 폭력성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의 시점에 동화돼 상황을 바라보게 되는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꿈의 제인>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소현’의 시선에 동화되기를 주저하게 된다. 소현은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었던 지수가 팸들에게 ‘신고식’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지켜만 볼뿐 그녀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소현을 연기한 배우 이민지의 대체 불가능한 페르소나는 소현의 캐릭터성을 더욱 부각한다. 억울한 듯 보이면서도,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마스크와 표정은 소현의 성격, 특징과 일체화된다. 1부(소현이 제인의 팸에 속해 있는 상황<꿈>을 1부, 제인의 자살 이후 소현이 가출팸들과 함께 생활하는 상황을 2부로 임의로 분리했다)에서 소현이 저녁시간에 잠시 밖에 나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몰래 먹는 씬이 있다. 입이 가득 차도록 억척스럽게 초콜릿을 먹는 소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상당히 짠하면서도 코미디적인 요소가 짙게 배어있다. 소현이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콜릿을 먹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소현은 가출청소년들의 생태계에서 포식자들의 위협 속에서도 보호를 갈구하는 ‘초식동물’ 같은 존재다.

 그것은 지수도 마찬가지다. 지수 역시,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껌을 씹는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먹는 행위’를 몰래 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소현이나 지수나 혼자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지수를 묻은 장소에서 지수의 동생이 소현에게 지수가 먹던 종류의 껌을 건네는 씬은 1부와 2부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어졌음을 시사하는 한편, 동생이 소현에게 건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꿈이나 현재나 네 삶은 결국 똑같아’하는 질책이거나, ‘지수도 너와 똑같은 존재인데 왜 그랬어?’하는 원망이기도 하다.  


홀로 숨어 초콜릿을 먹는 소현(1부)
눈치를 보며 껌을 입에 넣는 지수(2부)


 껌을 건네받은 소현은 달린다. 산을 건너고, 갈대밭을 지나 다다른 곳은 깊은 호수. 결국, 소현이 느끼는 것이 죄책감이든, 자기혐오든 간에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평생 소현을 쫓아다녔고, 앞으로도 쫓아올 불행이다. 이렇듯 소현은 1부에서나 2부에서나 불행을 선고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소현을 동정해야 할지는 여전히 망설여진다. 가출청소년들 역시 마찬가지다. 소현을 비롯해 그들은 살아오면서 제대로 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에 대한 결핍이 가출청소년들이 저지른 잘못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는 것이다. 가출청소년들은 어른들과 사회가 방치한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소현이나 지수 같은 초식동물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잔인한 육식동물이기도 하다. <꿈의 제인>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공통분모는 ‘모순’이다. 제인이라는 캐릭터 역시, 모순으로 점철된 존재다. 아니, 제인이야말로 영화 속에서 가장 모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제인은 △정호를 보고 싶어 하면서도 보고 싶지 않아하고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홀로 있을 때는 비애에 빠지고 △일상적이면서도 극적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인이 자신의 신체와는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는 트랜스젠더라는 것이다. 제인이 마지막 연설 씬에서 밝혔듯이 그러한 모순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성질인 것이다. 그러나 제인은 자신의 모든 성질들을 끌어안고 ‘unhappy’로 매듭짓는다. 제인을 연기한 구교환이 밝혔듯이 극 중에서 보이는 어느 하나가 제인의 본모습은 아니며, 모순적이고 결코 하나의 범주 아래 통합될 수 없는 특징들이 제인 그 자체다. 제인이 갖는 정체성은 제인을 불행하게 만들지만, 제인을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제인을 살아가게 만드는 단 하나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제인에 대한 이러한 설정은 불행과 삶이 얼마나 지독한 공생관계인지 보여주는 장치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꿈의 제인>이라는 제목과는 대조적으로, 영화 속 제인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꿈은 삶의 일부이지만 절대 현실의 경계선을 침범할 수는 없는 영역이다. 제인 역시 누군가에게 꿈처럼 왔다가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은 줄 수 없는 허상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제인은 누군가에게 쉽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인은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독보적이다. 

 제인은 몽환적이면서 음울해 보이지만 때때로 구시대적 언어들을 구사하며 코미디적인 연출을 자아내기도 한다. △‘땅에 떨어진 것은 줍는 사람이 임자’라고 실랑이를 벌이는 씬 △달을 향해 ‘오라, 오라’하며 끌어당기는 제스처를 취하는 씬 △‘네가 그런 말을 하면 하늘로 돌아가다 다시 돌와와’라고 말하는 씬 △미러볼을 훔쳤으면서 전화로 자신이 왜 그것을 훔치냐 라고 호통 치는 씬들은 코미디적 요소로 작용하며 폭소를 자아낸다. 제인은 결코 정형화될 수 없는 캐릭터인 것이다.


촬영기법에서 드러나는 불행의 형태

 프레임 속에 등장하는 소현은 항상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수직적 구조로 배치된다. 1부의 초반부, 제인은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워있고 제인은 침대 아래서 올려다보는 씬과 2부의 오프닝, 구석에 쪼그려 앉아 팸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올려다보는 씬이 그렇다. 무언가를 올려다본다는 행위는 약자의 시선이다. 이는 곧,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무력감을 수반한다. 이는 특정 인물을 바라본다는 일차원적인 행위를 넘어 소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러한 시선처리를 통해 소현과 세상이 갖는 불균형한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 대상이 가출 팸의 ‘아빠’라고 불리는 병욱이든, 소현을 윽박지르는 대포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상 속에서 소현이 만나는 모든 대상은 항상 가혹하리만큼 폭력적인 방법으로 소현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또한, 프레임 속에서 소현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서도 소현이 처한 ‘소외’ 상태를 해석할 수 있다. 1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캐릭터들의 역동성이 강조되고, 활동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2부에서 소현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건이 발생할 때, 프레임 속에서 소현은 항상 멀찌감치 떨어져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지켜보도록 배치된다.


병욱을 바라보는 소현의 시선 (2부)
신고식을 당하는 지수를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소현의 오버 더 숄더 샷(2부)

 

 가령, 소현이 지수가 팸으로부터 신고식을 당하는 씬에서 프레임 안에서 팸 혹은 지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의 끝에서 무표정하게 지켜만 본다. 감독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소현을 오버 더 숄더 샷으로 촬영해 관객들이 동떨어진 소현을 지켜보게 하거나, 직접적으로 소현의 카메라 시점을 관객들과 일치시켜 아예 관객들이 사건을 직접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촬영기법을 통해 관객들은 소현이 느끼는 무력감 혹은 소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전체적으로 소현은 프레임 속에서 가로, 세로 모든 배치에 있어 주류에 포함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와 상태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다.

  지수의 죽음을 두고 자신을 책망하는 대포에게 소현이 간신히 꺼낸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라는 대사는 프레임과 세상에서 소현이 처한 상황과 감정들에 무게를 실어준다.


끊임없이 회귀하는 불행의 이데올로기

 1부에서 제인이 케이크를 사서 팸들과 나눠먹는 씬이 있다. 케이크를 각자의 접시에 덜어주고 3조각이 남자 제인은 “사람은 넷인데 케이크는 세 조각이면 다 같이 안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행복해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자신이 행복해지려면 타인이 불행해져야 하는,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이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고 해도 좋고, 무한 이기주의라고 해도 좋다. 분명한 것은 영화가 필연적인 소외와 불행을 야기하는 사회구조를 직설적으로 겨냥해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삶의 비극이다. 누군가의 행복 아래서, 누군가는 끊임없이 불행해야 한다는 것. 이와 같은 씬이 한 번 더 반복된다. 1부에서 제인이 자살한 직후, 팸의 아이들은 식탁에 모여 제인이 자살하기 전에 싸놓은 김밥을 먹는다. 아이들이 하나씩 김밥을 집어가자 접시에는 김밥이 딱 3줄 남는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장센이다. 제인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후, 팸들이 직면하게 될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라고 할 수 있다. 제인이 얘기한 삶의 불행이 곧바로, 아이들의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제인과 함께 케이크를 먹는 아이들. 제인은 다 함께 행복할 수 없다면 모두 함께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1부)
제인이 자살한 이후, 첫 식사를 하는 아이들. 이번에는 김밥이 세 줄 남는다. 행복은 결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1부)


 이렇듯 1부에서 제인의 죽음은 소현을 비롯한 팸에게 있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말처럼 ‘행복은 죽었다’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제인이 소현에게 머물다간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소현은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 삶에 있어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말이다. 팸들이 제인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도 기괴하다. 그들에게 있어 꿈이었고, 행복이었을 제인을 제대로 된 장례절차도 없이 캐리어에 실어 야산에 묻는다는 것은 전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다. 암담해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들이지만 아무도 오열하거나 슬픔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과 행복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후회나 아쉬움도 없었을지 모른다.

 2부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되풀이한다. 1부에서 제인이 그랬던 것처럼 집의 난관에서 떨어져 죽는다. 삶의 가장 밑바닥으로의 추락인 셈이다. 그러나 1부에서 제인을 묻을 때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팸들의 표정은 1부에서 제인 팸의 표정보다 더 암울하면서도 담담하다. 또래 청소년이 자신들 때문에 자살을 했는데 일말의 죄책감이나 감정의 동요도 없다. 생활적인 측면에서나, 도덕적인 측면에서나 밑바닥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추잡하고 더러운 삶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수 있다는, 그리고 그 누군가가 청소년들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는 상당히 무겁다. <꿈의 제인>은 원론적으로 불행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삶 역시 불행하다. 결국 삶과 불행은 닭과 달걀처럼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 구태여 정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오랜 시간 함께했던 것이다.          


<꿈의 제인>이 불행을 표현하는 방식명암·로케이션·전개 구조

 영화에는 유독 빨간색이 자주 등장한다. △제인의 옷부터 시작해서 △오토바이의 빨간 마크 △지수 동생의 후드 △제인을 묻을 때의 이불 △때때로 소현의 입에 발라지는 빨간 립스틱이 그것이다. 빨간색의 활용이 일상적인 영역을 단순히 표현하는 것보다 과장돼 나타나고 있다. 빨간색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정열이나 따스함 같은 개념들을 연상시키지만 한편으로는, 퇴폐적이거나 음산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빨간색은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1부에서 제인이 야산에 묻힐 때, 제인을 덮은 이불의 빨간색에서 따스함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마치 피처럼 소름 끼치고 음산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제인이 일하고 있는 바(bar)인 ‘뉴월드’의 조명 역시 빨간색이다. 바 전체에 내려앉은 빨간 조명은 마치, 이 세상의 영역에서 벗어난 공간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로케이션 선정 역시, 주제의식을 반영한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주된 배경은 △공사장 △야산 △외곽지역 오피스텔 △싸구려 모텔 △지하도와 같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난 공간들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이 이뤄지는 공간들과는 달리, <꿈의 제인> 속 캐릭터들은 그곳에 편입하지 못하고 후미진 공간에서 한정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로케이션 선정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불행’이라는 주제를 가장 시각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전개 구조는 난해하다. 기승전결이나, 시간의 순서에 따른 전개를 생각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 요소가 많다. 기본적으로 전사(前史)가 없다. 불친절하다. 제인이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나 그 이전의 삶에 대한 설명 혹은, 소현이 가출청소년이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관객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트랜스젠더인 제인과 가출청소년인 소현이 지독하게 살아가는 과정만을 볼뿐이다. 이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다. 캐릭터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전 정보가 없으니 쉽게 동화되거나, 연민 혹은 분노의 감정을 갖기가 어렵다. 

 1부와 2부에 대한 설정 역시, 사전 정보가 없다면 맥락을 잡기가 난해하다. △어떻게 1부에서 죽은 제인이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지 △1부에서 분명히 함께 살았던 청소년들이 2부에서는 같은 팸에 있으면서도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그렇다면 1부와 2부 중 무엇이 현실인지 정말이지 수없이 헷갈린다. 각각의 서사들은 전혀 상관없는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의 분석들처럼 ‘불행’이라는 주제로 꽤나 긴밀하게 연결돼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연성 없어 보이면서도 나름의 규칙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꿈의 제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영화 속 대부분의 과정들이 ‘과거형’이라는 것이다. 소현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가 소현의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현의 ‘편지 내레이션’은 이 모든 과정들을 이미 소현이 겪었던 과거의 일들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꿈의 제인>은 소현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수취인 불명의 편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 말미, 소현이 환풍기에 영화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편지를 숨겨놓는 씬이 있다. 소현의 편지는 수많은 불행과 마주하고, 때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지독한 자기고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 봐주기를 원했던 것도 같다. 소현을 연기한 배우 이민지는 “감독님과 얘기했을 때는 수신인이 없는 편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레이션 작업을 하면서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거나, 상황에 처한 사람이 편지를 발견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영화 속 불행에 대한 지난한 역사는 이렇게 한 편의 편지로 기록된다.          


<꿈의 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꿈의 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영화의 후반부 제인의 연설 씬에 응축돼있다고 생각한다. 제인은 어두운 바에서 신나게 웃고 있지만 내일은 삶에 지쳐 울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    

      

unhappy(불행)라는 표식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입장권이 아닐까.


어쩌다 이렇게 한 번 행복하면 됐죠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그리고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여기서 또 만나요여기 뉴월드에서     


 행복은 한 번이면 족한데 불행은 오래오래 간직하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저주나 험담에 가까운 대사를 듣고 많은 사람이 위안을 받는다. 어제나 오늘이나 삶은 언제나 불행하다. 삶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더 비극인 셈이니까. 그럼에도 불행이라는 바다에서 모래 알갱이만큼 작은 행복이 우리를 살게 한다. 이 작은 행복이 오로지 나를 불행 속에서 잠시 눈감게 하고, 쉬게 만든다. 깨어나면 또다시 불행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오늘도 unhappy라는 스탬프를 손목에 찍고 삶의 한 가운데로 묵묵히 걸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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