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 없는 찐빵도 맛있을 수 있다
제목: 로건 럭키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출연: 채닝 테이텀(지미 로건 役), 아담 드라이버(클라이드 로건 役), 다니엘 크레이그(조 뱅 役), 라일리 코프(맬리 로건 役)
#1시간 59분 #코미디 # 범죄 #드라마 #<오션스> 시리즈 감독의 귀환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해당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스포일러가 미운 분들은 영화 관람 후에 찾아와 주세요 ㅠ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적잖이 놀랐다. 영화를 꽤 많이 본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로건 럭키>와 같은 류의 영화는 처음 본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범죄 모의자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뭉쳐서 한탕한다는 뻔한 클리셰에 채닝 테이텀부터 다니엘 크레이그에 이르기까지 야성미 폭발하는 배우들을 얹었다. 너무 뻔해서 이미 영화 한 편을 다 본 느낌이 드는가? 그러나 장담한다. <로건 럭키>는 당신의 예상을 그대로 따라갈 만큼 예의 바른 영화가 아니다.
채닝 테이텀과 다니엘 크레이그에게서 야성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이런 류의 영화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박진감 넘치는 액션 씬도 없다.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쯤 되면 나에게 묻고 싶어질 거다. 그래서 재미가 없냐고? 나름 재밌어서 놀랐다는 거다. 분명 팥 없는 찐빵인데 맛있다. 생각해보면 찐빵에 팥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 손님 입장에서는 맛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로건 럭키>는 맛있다. 스티븐 소더버그 주방장이 만든 <로건 럭키>의 시식평. 지금부터 시작한다.
<로건 럭키> 맛있게 보는 법 1: 뻔하지 않은 스토리
범죄자들이 모여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를 케이퍼 무비(Caper Movie)라고 한다.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케이퍼 무비는 번화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 씬과 긴박한 스토리 전개가 그 특징이다. 같은 케이퍼 무비임에도 <로건 럭키>는 다르다. 미국의 한적한 시골 동네인 '웨스트 버지니아'를 영화의 배경으로 설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웨스트 버지니아를 배경으로 액션은 빼고, 최소한의 긴박함만 유지했다. 조리 방법이 달라지면 재료도 달라지는 법. 캐릭터 설정 역시 기존 케이퍼 무비와는 다르다. 기존 케이퍼 무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설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분야에 특출 난 천재 거나, 엄청난 신체 조건을 가졌거나. <로건 럭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러한 설정과는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로건 럭키>는 범죄판 어벤저스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벌여놓은 판은 거의 어벤저스 급이다. 목표는 지상 최대의 레이싱 대회라고 할 수 있는 코카-콜라 600 당일, 경기장의 모든 돈이 보관돼있는 지하 금고를 터는 것. 그것도 경비가 제일 삼엄한 경기 중간에 말이다. 가진 건 엉뚱함밖에 없는 괴짜들이라 이들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진짜 걱정이 된다.
다른 케이퍼 무비들에 비하면 치밀함이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이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범죄를 계획한다. 그게 포인트다. 딱 봐도 조잡해 보이는데 그들은 세상 진지하다는 거. 관객과 캐릭터 사이에 생기는 정서상의 괴리감이 영화가 심심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간을 해준다. 그렇게 투탁투닥 영화가 중간 지점에 다다랐을 때쯤, D-Day가 찾아온다.
예상했겠지만 당연히 계획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터져야 할 폭탄은 터지지 않고, 돈을 옮기는 튜브가 막혀버리고, 돈을 챙기는 와중에 경비원들이 들이닥친다. 관객들이 케이퍼 무비를 관람할 때 바라는 것들이 있다. 범죄가 매끄럽게 진행되다가도 긴장감을 위해 약간의 위기 상황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넣어줄 것.
하지만 <로건 럭키>는 좀 심각하게 위태롭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참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급조된 위태로움이 아니라 영화 설정과 합이 잘 맞춰진 위태로움이랄까. 6명의 괴짜들만이 형성할 수 있는 기묘한 위태로움은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기존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케이퍼 무비의 본질에 다가간다.
영화 전체를 범죄의 계획과 실행에만 할애하지 않은 것 역시 <로건 럭키>만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우여곡절 끝에 돈을 훔친 일당들. 보통의 케이퍼 무비라면 그들이 훔친 돈으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엔딩 크레디트에 실어주며 끝날 것이다. 그러나 웬걸. <로건 럭키>는 돈을 훔쳤는데도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 지미가 경찰에게 훔친 돈이 있는 곳을 신고하는 씬이 이어지며 영화는 다시 시작된다.
무슨 소리냐고? 말 그대로다. 기껏 훔쳐놓고 되돌려 준 셈이다. 그리고 지미는 사라진다. 당연히 경찰은 일당을 검거하기 위해 수사망을 펼친다. 이러다 진짜 잡히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수사망이 좁혀지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수사관과 증인들은 '그게 가능하겠어?'하며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다. 분명 돈은 훔쳤는데 영화는 관객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쯤 되면 거의 관객 농락 수준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지미가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자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상황을 납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아니지. 관객들을 위해 또 하나의 반전을 남겨놓고 나서야 영화를 끝마친다. 스토리 전개도 그렇고 플롯도 그렇고 결코 일반적인 케이퍼 무비가 아니다.
<로건 럭키> 맛있게 보는 법 2: 배우 & 캐릭터
케이퍼 무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캐릭터 설정이기에 <로건 럭키>는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로건 럭키>의 메인 캐릭터는 '로건'가문 삼 남매와 '뱅'가문 삼 형제라고 할 수 있는데 꽤나 신박한 조합이다. 지미 로건은 한때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였으나 무릎 부상으로 다리를 절고 탄광에서 일하고 있으며 클라이드 로건은 파병 중에 한쪽 팔을 잃어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막내 멜리 로건은 미용사다.
뱅 가문은 대놓고 괴짜들이다. 야매(?) 폭발 전문가 조 뱅은 현재 감옥에 수감돼있고 샘 뱅과 피쉬 뱅은 맨날 술만 마시는 전과자들이다. 범죄와는 1도 상관이 없는 삼 남매와 야매 절도범 삼 형제가 만났으니 당연히 정상적이지 않다. 너무 괴짜들이라 하는 짓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케미는 최고다.
속았다면 속았다고 할 수 있다. 채닝 테이텀(지미 로건 役)과 다니엘 크레이그(조 뱅 役)하면 완벽한 몸과 야성미 넘치는 이미지 그 자체 아닌가. 아쉽게도 <로건 럭키>에서 그들의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채닝 테이텀은 배 나온 평범한 옆집 아저씨가 됐고, 다니엘 크레이그는 건들건들한 동네 한량이 됐다.
특히, 다니엘 크레이그의 변신은 놀라웠다. <로건 럭키>속 그의 모습을 보고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연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 배우와 배역의 매치가 잘 제단 된 옷을 입은 듯 깔끔하게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연기가 좋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유명한 채닝 테이텀과 다니엘 크레이그 외에 주연 배역들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썩 괜찮은 편이다.
일당 중에서 가장 침착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클라이드 로건 역의 아담 드라이버는 형 지미 로건을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 의지하는 둘째 특유의 애증 어린 연기를 잘 보여줬고, 멜리 로건 역의 라일리 코프는 톡톡 튀는 경쾌한 연기를 보여주며 무난하게 배역을 수행했다. '윈터 솔저'로 유명한 세바스찬 스탠도 등장하지만 분량 많은 카메오 급이라 왈가왈부하기가 그렇다. 그의 분량을 기대하지는 말자.
이토록 많은 배우들이 <로건 럭키>의 배역을 연기했지만 가장 돋보인 배우는 지미 로건의 딸, 새디 로건을 연기한 파라 매킨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제2의 클레이 모리츠를 봤다. 너무 귀엽고, 연기도 부담스럽지 않게 잘 해내서 나오는 씬마다 삼촌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분명 다른 관객들도 나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로건 럭키> 맛있게 보는 법 3: 실소 유발하는 자잘한 개그 코드
<로건 럭키>는 큰 한방으로 관객의 웃음을 낚으려고 하지 않는다. 권투로 따지면 육중한 훅(Hook)보다는 자잘한 잽(Jab)에 가깝다. 그런데 그 잽이 굉장히 유치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자면 조 뱅이 동생들에게 '숲 속에 가서 곰을 만나고 와'라고 암호를 전했더니 진짜 숲 속에서 곰 옷을 입은 사람이 동생들에게 물건을 건네주는 식이다. 하나도 재미없어 보인다고? 자존심 상하지만 나는 웃어버렸다.
위의 예처럼 딱히 미국식 개그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말장난 같은 개그가 많아 굳이 미국의 정서를 이해하지 않더라도 웃음을 내어줄 수 있다. 그리고 깜빡이라도 키고 들어와 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시도 때도 없이 개그를 치기 때문에 항상 무방비 상태로 웃게 된다. 가령 일당들이 경비원으로부터 들키기 일보직전에도 개그를 빵빵 터뜨려준다. 종잡을 수가 없다.
조 뱅이 잠시 탈옥한 사이, 그가 감옥에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동료 죄수들이 간수를 인질 삼아 폭동을 일으키는 씬 역시 시종일관 장난기가 가득하다. 죄수들이나 교도소장이나 딴에 진지하게 교섭을 하는데 하는 말들이나 행동들이 어이가 없어 실소 아닌 실소를 유발한다.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멍청함 역시 주된 개그 코드로 작용한다.
<로건 럭키> 맛있게 보는 법4: 컨트리 음악 & 웨스트 버지니아
<로건 럭키>가 기존 케이퍼 무비와 차이점을 보이는 마지막 한 가지. 바로 컨트리 음악이다. 사실상 <로건 럭키>는 컨트리 음악으로 시작해서 컨트리 음악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영화의 첫 씬은 주인공 지미가 딸인 새디에게 컨트리 음악을 알려주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후에도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컨트리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웨스트 버지니아는 컨트리 음악으로 유명한 곳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케이퍼 무비에 컨트리 음악과 정서를 얹기 위해 꽤나 고심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음악뿐만 아니라 풍경, 의상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컨트리 정서가 깊게 배어있다. 개그 코드와는 달리, 이러한 음악과 정서는 오롯이 미국인의 입장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에 조금은 낯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이해까지 할 필요는 있을까. 경치 좋은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편안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분명,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케이퍼 무비와 컨트리 음악의 만남이라니. 개인적으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조합이었다. 캐릭터, 스토리 등의 요소가 탄탄하지 못했다면 난장판이었겠지만 나름 탄탄한 재목들이라 컨트리 정서를 잘 받쳐주었다고 판단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아니다. 영화를 음미하다 잘 씹히지 않거나 쓴 맛이 나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군데군데 개연성이 부족한 씬을 집어넣어서 '이 상황에서 굳이?' 혹은 '이걸 왜 넣은 거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화 중후반,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일당 사이에 싸움이 발생하며 갈등이 고조된다. 그런데 그 갈등의 원인이 굉장히 유치하고 설득력도 없어 실망했다.
분명, 케이퍼 무비는 긴장감이 필수다. 그래서 감독들이 느슨해진 분위기를 타이트하게 하고자 예외의 상황을 투입시킬 때가 있는데 잘못하면 영화가 텁텁해지기만 하는 부작용이 있다. <로건 럭키>에는 그런 씬들이 간혹 보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목적은 완전무결함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개연성의 부족만 제외한다면 나는 <로건 럭키>에 꽤나 만족하는 편이다.
배경, 캐릭터, 스토리, 사운드 모든 부분들이 케이퍼 무비의 전형을 벗어났지만 역설적으로 케이퍼 무비의 본질에 한없이 다가가고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기 때문 아닐까. 나는 그 새로운 시도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단순히 시도했다는 의의를 넘어서 완성도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내 결론은? 팥 없는 찐빵도 맛있을 수 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