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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Jan 10. 2018

(빌어먹을)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외치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 본격 해체 리뷰

                              

제목: 빌어먹을 세상 따위(The End Of The Fucking World)         

감독: 조나단 엔트위슬, 루시 처니악   

출연: 제시카 바든(앨리사 役), 알렉스 로우더( 제임스 役)

방영: 2018년 1월 5일 동시 방영


※이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솔직히 드라마든, 영화든 사연 없는 주인공이 어디 있나. 그 사연이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할수록 우리는 주인공에게 열광한다. 애초에 주인공을 지켜보는 우리부터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가득 찬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비슷한 존재에게 더욱 애착을 가진다. 꼭 같은 사연일 필요는 없다. 그냥 지독하게 아팠다는 거, 그 뭉텅이진 감정과 경험을 겪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주인공 제임스와 앨리사는 우리가 왜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지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사이코패스 제임스 앞에 나타난, 자신을 무시하고 성희롱하는 새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앨리사.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드러내지 않은 깊은 상처가 있다. 말 한번 걸어본 적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통하는 것 같은 제임스에게 앨리스는 무턱대고 어디로든 떠나자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임스는 앨리사를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흔쾌히 동의한다. 그렇게 죽이고 싶은, 떠나고 싶은 17살 소년, 소녀의 본격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아니, 범죄 로드무비로 정정해야겠다.


제임스와 앨리사의 첫 만남. 서로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닌가요...


 정신적 고난을 육체적 수난으로 극복하는 로드무비는 정직한 맛이 있지만 너무 성스러워서 가끔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와일드>처럼. 제임스와 앨리사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 길의 시작과 끝에서 끊임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빌어먹을 세상 따위>는 이들을 굳이 교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Drive it you like stole it. 의역이 아니라 정말 시종일관 훔친 듯이 달린다. 물론, 제임스와 앨리사는 변한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긍정과 부정의 구분에서 벗어나서 더 자신다워진다고 해야 할까.


영화 <와일드> 2014년 作. 이런 로드 무비는 너무 경건하잖아요...


 자신을 사이코패스라고 믿으며 살았고, 그렇게 행동해왔던 제임스가 사실은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님을 깨닫는 씬이 있다. 그게 너무 짠했다. 이 장면을 보고 어머니의 자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유년 시절의 정서적 충격으로부터 제임스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사이코패스라는 철장에 가둬 감정이 새 나가지 못하게 막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제임스가 저지른 잘못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요점은 제임스에게 세상은 애당초 빌어먹을 곳이라는 거다.


본격 (빌어먹을) 로드 트립의 시작  


 그건, 앨리사도 마찬가지다. 8살 때 자신을 떠난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망친 장본인이면서도 새아빠의 쓰레기 같은 언행과 이를 모른 척하는 어머니로부터 지쳐가는 자신에게 비상구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여행의 끝자락에 찾아간 아버지는 그녀의 비상구가 아니었다. 탈출해야만 하는 탈출구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제임스와 달리 앨리사는 계속 아버지의 곁에 머물려고 한다.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이 빌어먹을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도 희망은 있다고 믿고 싶었는데 실망할 자신이 없었던 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진지해서 놀랐다는 거다. 대놓고 진지하지는 않았지만 캐릭터의 내적 변화가 생각보다 무게 있게 전개됐다. 감정적 구도 역시 캐릭터의 내적 변화로 인해 한차례 비틀어진다. 무감정, 무감각으로 일관해온 제임스가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님을 자각하고 지금껏 묻어온 감정의 폐기물들을 헤집어 꺼내는 순간 제임스는 앨리사를 사랑하게 된다. 이를 분기점으로 메인 주인공이 앨리사로 틀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부터 앨리사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제임스는 그런 앨리사를 걱정하는 역으로 물러난다.  


드라마의 후반부의 제임스. 앨리사 뒤만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강아지같다


 마지막 화 엔딩 씬은 제임스가 겪어온 감정적 변화의 피날레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모든 관계를 차단해온 제임스가 앨리사와의 관계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독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앨리사가 막연한 이끌림으로 시작해 마음을 다해 제임스를 사랑하기까지도 많은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해봤을 때, The End Of  The Fucking World를 ‘빌어먹을 세상 따위’로 번역하기보다 직역해서 ‘빌어먹을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게 더 드라마의 느낌을 더 전하기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임스와 앨리사가 도착한 빌어먹을 세상의 끝


 마지막 화에서 앨리사는 바다를 보며 “우린 세상 끝에 와 있는 것 같았죠”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임스는 앨리사를 위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경찰들을 피해 썰물로 물이 다 빠진 바다 끝으로 달린다. 그들은 빌어먹을 세상 속에서 빌어먹게 불행한 삶을 살다가 결국, 빌어먹을 세상의 끝에 섰다. 그리고 그들이 빌어먹을 세상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서로였다. 제임스는 바다 끝을 향해 달리며 말한다.

      

빌어먹을 세상의 끝에서 제임스가 찾은 것은 무엇일까


“이제 막 18살이 됐어요. 그리고 이제 알 것 같아요.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요”

    

 너무 쉬운 결말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처럼 결국 ‘사람’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형식적인 답으로 빌어먹을 세상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이러니한 점도 있다. 제임스의 어머니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과의 관계가 있었지만 아들 앞에서 자살해 버렸고, 앨리사의 아버지 역시 그를 사랑하는 부인과의 관계가 있었지만 쓰레기 같은 삶을 청산하지 못하고 딸을 두고 떠났다. 관계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아이가 세상의 끝에서 서로의 의미를 간직하다니.

 제임스와 앨리사의 깨달음은 철없던 젊은 날의 치기 어린 반항일까, 빌어먹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인 걸까. 빌어먹을 세상 따위는 제목처럼 빌어먹게도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 총성만으로 답을 내렸을 뿐이다. 이 결말을 두고 시즌 2 제작에 대한 말이 많은데 내 생각에는 나올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마지막 화를 급하게 전개시킨 것도 찜찜하고 지나치게 열린 결말인 데다가 제임스에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고 쓰러진 경찰이 눈을 뜨는 씬을 보고 왠지 모르게 제임스와 앨리사를 다시 한번 도와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즌 2에 대한 떡밥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솔직히 이렇게 제임스 죽이고 끝내면 너무한 거잖아요 감독님... 암튼, 제임스를 올해는 아니더라도 내후년 안에는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형적인 영드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스킨스>, <미스핏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거칠고 전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생뚱맞음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나한테는 꽤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8회분인데 1회당 20분밖에 안 해서 부담 없이 보기도 편했던 것 같다. 그리고 The End Of The Fucking World라니. 제목부터 너무 취향저격이잖아요...


*<빌어먹을 세상 따위> 시즌 1 리뷰 재밌게 읽으셨나요? '좋아요'와 '구독' 눌러주시면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빌어먹게 완벽한 하루 보내시기를. 시즌 2 리뷰도 함께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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