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vie Street Apr 16. 2018

<몬태나> 리뷰

폭력의 연대기 속, 용서는 어떻게 이뤄지나

제목: 몬태나(Hostiles)

감독: 스콧 쿠퍼

출연: 크리스천 베일(조셉 대위 役), 웨스 스투디(옐로우 호크 추장 役), 로자먼드 파이크(로잘리 役)

#2시간 11분 #로건 #용서 #속죄# 폭력의 역사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 매거진 <8장으로 읽는 영화 카드뉴스>를 방문하시면 <몬태나>에 대한 간단한 스토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몬태나>는 폭력의 연대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파멸해가고 또, 용서받게 되는지 건조할 만큼 객관적으로 다룬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892년은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일방적인 전쟁이 종식되는 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탐욕만이 가득했던 침탈 속에서 인디언, 미국인 가릴 것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인디언들은 자신의 가족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죽여야 했고, 군인들은 정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죽여야 했다.

 이들은 그렇게 서로의 소중한 사람들을 죽였다.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적을 죽이겠다는 적개심으로 메워졌다. 이러한 폭력의 연대기를 배경으로 영화는 인물들에게 잔인한 시련을 준다. 원수를 보호해야 하고, 원수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 영화의 원제 'hostiles'처럼 이들은 '적대자들'이다. 이 풀 수 없는 난제를 스콧 쿠퍼 감독은 기어코 풀어낸다. 그러나 절대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숙적을 보호해야 하는 조셉과 숙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옐로우 호크.



 감독은 폭력이 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관점으로 조망한다. 비단, 조셉과 옐로우 호크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로잘리는 인디언들을 보는 순간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에 패닉 상태가 되고, 인디언 아이는 코만치 부족의 기습으로 어른들이 죽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고, 사람을 처음 죽이게 된 루디 중위는 죄책감에 빠지고, 20년 간 인디언을 죽여온 라우데 상사는 전쟁의 종식 앞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자살한다.

 당시 살육에 가담했던 이들이 역사를 걸어오며 남긴 폭력의 발자취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잔인한 살육의 얼룩은 아무리 속죄를 해본다고 한들 씻어낼 수 없다. 용서는 비로소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마음 다짐일 뿐,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이들에게 속죄를 허락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살인의 기억'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피해자와 피해자의 소중한 사람을 살해한 가해자 모두에게 배분된다.


폭력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간에게 흔적을 남긴다


 옐로우 호크와 조셉은 동일한 살인의 기억을 갖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되기를 번갈아서 반복해온 숙적이다. 복수가 계속될수록 서로에게 매듭지어진 적개심의 고리는 수년 간 계속해서 견고해졌다. 그러나 코만치 부족의 습격으로 서로의 일원을 잃으면서 두 사람은 생각한다. 그들이 살아야 했던 끊이지 않는 그 살육의 현장 속에서 두 사람은 살기 위해서 또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었음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서로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서로의 소중한 사람 혹은,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무리 죄책감을 통감한다고 한들, 덜어낼 수 없는 마음의 형벌이었다. 로잘린과 인디언 아이에게 트라우마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셉과 옐로우 호크에게 허락된 것은 서로에게 저질렀던 잔인한 사실들을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전부였다.  

             
"난 많은 친구를 잃었소.
댁도 많이 잃었지"


 옐로우 호크에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조셉과 옐로우 호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한 후, 악수를 나눈다. 그것은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최대한의 용서였고 포용이었다. 폭력에 대한 잔혹성을 증발시키지 않고, 무겁게 용서를 다뤘다는 점에서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로건>과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울버린은 자신과 동일한 능력을 가진 어린 'X-23'이 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얼마나 힘들었니'라는 메시지 대신 '그럼에도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러나 영화는 '폭력과 용서'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누가 이들을 '폭력의 연대기 속으로 밀어 넣었는가'하는 의문점을 시사한다. 사실,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짓은 전쟁보다 학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폭력의 연쇄작용은 정부에게 명령을 하달받은 군인이 인디언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몬태나>의 주제의식이 말하듯, 살육을 저지른 군인과 인디언 모두를 두둔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잘못은 역사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무고한 이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처참한 슬픔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핵심은 역사적 사건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방치한 미국 정부의 부도덕성을 꼬집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내에서 여전히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도 존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셉에게 옐로우 호크가 원수이듯, 옐로우 호크에게도 조셉도 원수다. 당연히 적개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는 조셉과 그의 부하들이 표출하는 적개심만 보여줄 뿐, 옐로우 호크와 그의 일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또한,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로 인디언이 미국인을 살해한 사실이 미국인이 인디언을 살해한 사실보다 더 자주 묘사된다. 미국인과 인디언을 평등하게 다루지 않고 비대칭적으로 다뤘다는 의미다. 이처럼 영화가 조셉(미국 군인)과 옐로우 호크(인디언)에게 공평하게 속죄의 길을 터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느낀다. 미국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몬태나>의 가장 큰 오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외적인 요소에 대해 말하자면 서부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만큼 장엄한 풍경들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 초목으로 우거진 넓은 들판 속에서 한 줌 점으로 보이는 조셉 일행들을 보면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하는 존재론적 회의감에 빠질 정도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인상 깊었는데 그중에서도 로자먼드 파이크의 연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인디언들에 대한 공포감과 자식을 잃은 상실감을 소름 돋을 정도로 세심하게 연기해낸다.  

  결과적으로 <몬태나>는 미국 군인과 인디언을 다루는 비율에 있어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 속죄의 무게를 절대 낮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도 스토리 진행을 원활하게 뒷받침해줬다. <로건>을 인상 깊게 본 사람들에게 <몬태나>를 추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