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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May 06. 2018

<박하사탕> 리뷰

절대적 권력 앞에 선 개인의 유약함을 조명하다

제목: 박하사탕

감독: 이창동

출연: 설경구(김영호 役), 문소리(윤순임 役), 김여진(양홍자 役)

#2시간 10분 #나 돌아갈래 #5·18 민주화 운동 #18년 만의 재개봉


 <박하사탕>은 이창동 감독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발화되는 현대사의 비극이다. 희생자와 非희생자의 구분이 명확한 기존 영화와 달리, <박하사탕>은 우리가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는 희생자에 대한 정의를 무력화시킨다. <화려한 휴가>, <택시 운전사>처럼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영화에서 희생자들은 일반적으로 국가라는 조직 앞에 파편화된 ‘절대적 약자’ 혹은, 우리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친절한 ‘보통 사람’으로 다뤄진다.

 <박하사탕>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마흔 살의 영호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저열하고 치졸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는 희생자의 모습과는 정반대다. 관객은 영호가 왜 그런 삶을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인물의 행동 근거를 파악할 수 있게 돕는 전사(前史)가 사전에 제공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박하사탕>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이창동 감독은 영호의 현재를 시발점 삼아 점진적으로 영호의 과거를 조명해나가는 역순행적 서사를 취했다.

 영호의 과거 찾기에 동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호는 아내를 비롯해 자신보다 약자라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으며 살아왔다. 과거로 회귀할수록 폭력의 광기는 더욱 짙어진다. 특히 형사 시절, 운동권 학생들을 잔인하게 고문하는 영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심적으로 괴로웠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악랄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영호는 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영호,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사는 1980년 5월로 회귀한다. 그곳에는 어떠한 종류의 폭력에도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영호가 있다. 영호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영호는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 작전에 차출되고 실수로 한 고등학생을 죽이게 된다. 영호가 자신이 죽인 고등학생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씬에서 느껴지는 죄책감과 절망감은 너무 생생해서 피부에 와 닿을 정도다. 

 서사가 가장 마지막으로 맞닿은 곳은 1979년. 스무 살의 영호가 야유회에서 첫사랑 순임을 만난 때다. 이름 없는 꽃들을 찍는 사진가가 되고 싶다던 영호를 비추며 영화는 지난했던 서사의 막을 내린다. <박하사탕>은 비극적인 현대사에 맞닥뜨린 개인이 얼마나 처참하게 부수어질 수 있는지 소름 끼치도록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 희생자는 우리가 기존 영화에서 목격한 희생자의 모습이 아니다.

 영호는 명백한 가해자다. 이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가 저지른 폭력으로 고통받아온 희생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영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으로 영호는 부당한 국가권력으로부터 폭력을 강요당하고 삶을 유린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권력 앞에 영호도 약자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 작전 당시 영호는 신병이었고, 선배들로부터 운동권 학생을 고문하며 취조할 것을 강요받았던 당시 영호는 신참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아픈 기억은 흉터다. 아물수는 있어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호는 부당하게 권력을 손에 쥔 정부의 하수인으로서의 삶을 강요받았고 거스를 수 없는 권력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인간성을 마모시켜왔다. 이창동 감독은 영호의 과거로 씬을 전환할 때마다 필름을 되감아 기차가 온 길을 되돌아가는 씬을 배치시켰다. 기차는 영호가 탑승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현대사였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책의 제목처럼 이 비극적인 역사에 탑승하는 순간, 개인은 정체성을 구속당한 채 끊임없이 굴종을 강요당한다.

 영화의 초반, 영호가 달려오는 기차를 가로막으며 “나 다시 돌아갈래”라며 외치는 씬은 한 개인이 절대적 권력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영호가 저지른 잔혹한 폭력들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애초에 영화의 목적도 아닐뿐더러 어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창동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박하사탕>은 폭력과 가해자에 대한 어떤 합리화가 결코 아니라 현대사와 맞물린 한 인간의 시간을 되돌려 현실 결과의 원인을 찾는 실존적 작업이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즉, <박하사탕>은 결코 망각돼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일반적인 영화들이 사용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결과적으로 당시 사건들에 책임이 있는 장본인들에게 잘못을 묻는다. 


엇박나버린 삶은 어떠한 박자로도 다시 맞출 수 없다


 영화의 시작인 1999년 그리고 마지막인 1979년. 영호는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부른다. 그러나 1999년 마흔 살의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영호는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 반주와 노래가 계속해서 어긋난다. 비극적인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변해버린 순간, 영호는 더 이상 순수했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 번 어긋나 버린 삶의 간극은 영호가 메우기에 너무 깊었다.

 희생자들에게는 가해자로, 국가에게는 희생자로 존재하는 영호의 삶은 결코 희생자와 가해자의 한 부류로 규정지을 수 없는 이중성을 갖는다. 매운맛과 달콤한 맛이 공존하는 박하사탕처럼. 청산되지 못한 비극적인 역사가 존재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알싸한 박하사탕 향이 풍긴다.


리뷰 원본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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