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제목: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출연: 티모시 살라메(엘리오 役), 아미 해머(올리버 役), 마이클 스털버그(펄먼 役), 아미라 카서(아넬라 役)
#2시간 12분 #이탈리아 #아트버스터 #사랑 #원작 안드레 애치먼 <그 해, 여름 손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순수와 열정이 공존하는 한 편의 사랑 시 같은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가 그렇고, 작품의 정서가 그렇다. 이에 더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차용한 '이탈리아 남부 크레마'라는 낭만적인 공간적 배경은 작품의 내적 매력을 로스팅해 관객에게 짙은 향을 선사한다. 머금고 음미하기에 좋다. 오래 머금고 있을수록 향이 더욱 풍부해지는 영화다.
영화 속으로 깊게 들어가 보자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에 대한 영화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템포뿐만 아니라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감독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사랑을 암시하는 미장센으로 영화를 수놓았다. 그런데 그 미장센의 밀도가 너무 옅어서 모든 씬들을 돌이켜보고 나서야 비로소 미장센임을 알게 될 정도다.
영화의 후반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엘리오와 올리버가 대화를 하는 씬에 이르러서야 무심코 넘겼던 올리버를 바라보는 엘리오의 눈빛이, 엘리오를 터치하는 올리버의 손짓이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뒷장에 있는 정답지를 보지 않으면 풀이과정을 절대 알 수 없는 수학 문제 같은 사랑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은 항상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다.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때의 말이, 그때의 행동이 사랑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알듯 말듯 애매한 사랑의 묘미를 이탈리아라는 화폭 위에 잘 그려냈다. 그저 '사랑'이었다.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와 같은 인위적인 구분은 영화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동성애는 동정의 대상도 아니었고, 투쟁해서 얻어야 하는 성과도 아니었다. 단지, 로맨스였다. 동성애를 '특이한 것' 혹은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시키지 않았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즉,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온전히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사랑을 확인한 밤, 올리버는 엘리오에게 말한다.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함으로써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된다는 것. 올리버의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작품을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관객에게 의미 없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엘리오와 올리버의 행동은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함으써 그 의미를 찾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름으로써 서로가 사랑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진정한 하나가 됐음을 느꼈다. 사랑의 명명(命名)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 대체 불가능한 의미 있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모든 꽃은 항상 지기 마련이다. 올리버는 결국 엘리오를 떠난다. 물리적 거리가 아닌 정신적 거리에서 영구하게. 함께하는 모든 순간마다 세상의 마지막인 것처럼 서로를 안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새로운 싹조차 틔워낼 수 없을 만큼 시들어버렸다. 올리버에게 전화로 결혼 소식을 통보받는 엘리오가 타는 장작불 앞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는 엔딩 씬은 압권이었다.
엘리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사랑 역시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불장난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까. 서로가 서로의 꽃으로 존재했던 기억들을 떠올렸을까. 이제는 아무리 자신의 이름으로 올리버를 불러보아도 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까. 그 순간, 엘리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씁쓸한 웃음이 번진다. 엘리오는 올리버와의 사랑과 이별로 성장하겠지만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사랑'을 굉장히 신중하게 다룬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사랑은 결코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앞 뒤 재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푼수 같은 첫사랑도 보여주고, 이별을 눈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서로를 대하는 성숙한 사랑도 보여준다. 올리버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엘리오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씬에서 다음과 같은 올리버의 나레이션이 등장한다.
흐르는 강의 의미는 모든 것이 변화하여 우리가 그것을 두 번 볼 수 없음이지만
어떤 것들은 오직 변화하기 때문에 같은 상태로 남는다
엔딩씬이 말해주듯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강물처럼 감정이 매 순간 시간 속으로 계속해서 흘러가버림으로써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물과 사랑에는 차이점이 있다. 강물은 흘러가버림으로써 본질의 지속성이 부정당한다. 하지만 사랑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그 자체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항상 변함으로써 같은 상태로 남는다는 패러독스가 발생한다. 사랑이 복잡한 이유다.
사랑은 매 순간 변하므로 당연히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 역시 매 순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의 형태는 영화가 시작해서 끝나기까지 끊임없이 변했고 서로에 대한 생각과 감정도 계속해서 달라졌다. 그러나 결국은 사랑이었다. 올리버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고 온 엘리오가 깊은 슬픔에 잠겨있자 엘리오의 아버지는 말한다. 지금의 그 슬픔,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도 함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사랑은 행복과 슬픔을 함께 아우르는 단어였다. 그러니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네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부터 행복과 슬픔은 마음 깊은 곳에 아로새겨진다는 것이다. 엘리오는 행복했던 만큼의 괴로울 테지만 언젠가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몸짓이 되고 싶으니까. Call Me By Your Name.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어렵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경에만 눈을 돌렸다가는 수수께끼같은 미장센들을 놓쳐버리기 쉽상이다. 스토리 전개에 있어 기승전결의 골격만 유지할 뿐, 굴곡은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에 루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보지 않으면 분명 좋았는데 뭐가 정확히 좋았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만큼 매 순간 섬세한 영화다. 평단에서는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의 뒤를 이을 아트버스터로 지목된 바 있는데 과연 그렇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구성하는 영상미, 스토리, 연기, 사운드트랙과 같은 모든 요소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정갈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럼에도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라 올리버의 시선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