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애'라는 진부한 명제에 대한 놀란 감독의 증명식
제목: 인터스텔라(2014 作)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매튜 맥커너히(쿠퍼 役), 앤 해서웨이(아멜리아 役), 제시카 차스테인(머피 役), 마이클 케인(브랜드 役)
#2시간 49분 #가족애 #상대성 이론 #사건의 지평선 #시간 #사랑 #우주 #은하계
놀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장르가 중첩되는 작품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매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장르인 셈인데 하나같이 오랜 시간 해당 장르만을 고집해온 장인의 노련미가 느껴진다. 영화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이번에 다룰 작품 <인터스텔라>는 놀란 감독이 우주를 배경으로 그려내는 한 편의 휴먼 드라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처음 시도하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지적 품위와 시각적 품격을 충족시키는 기적을 제작한다. 놀란 감독은 답을 찾았다. 늘 그랬듯이. 이제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일종의 확신으로 다가온다.
놀란 감독의 작품은 자기파괴적 성향이 굉장히 짙다. 서사가 분열과 혼란을 구심력으로 끊임없이 회전하기 때문이다. 음울할 수밖에 없는 서사 구조만을 고집하지만 놀란 감독은 여전히 희망을 믿는다. <인터스텔라>는 놀란 감독의 작품 중 가장 희망적인 작품으로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감정의 과잉을 목격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가 저지른 탐욕의 결과로 지구에서 인류의 생존이 불가능해졌다는 디스토피아적인 가정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결과적으로 가족애라는 진부한 코드로 마침표를 찍는다.
놀란 감독은 주인공 쿠퍼에게 인류의 생존을 위해 지구로부터 몇 만 광년 떨어진 은하계로 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사랑하는 자식들 '머피'와 '톰'으로부터 격리시킨다. 영화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상대성 이론'은 쿠퍼가 임무를 수행하는 은하계와 아이들이 있는 지구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근거가 되며 끊임없이 가족애에 간섭한다. 임무를 수행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자신이 지구를 떠나던 당시의 나이가 된 아이들의 모습을 영상 메시지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쿠퍼의 무력함은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
Interstellar의 사전적 의미는 '행성과 행성 사이'로 <인터스텔라>는 아이들이 있는 지구와 쿠퍼가 있는 행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공간적 격차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놀란 감독은 행성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라는 무한의 시공간을 가족애라는 무한의 감정으로 채워 넣는다. 영화 해석의 실마리는 놀란 감독이 가족애를 우주 공간에 채워 넣는 방식에 있다. <인터스텔라>는 놀란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딜레마가 제시되는 작품이다. 놀란 감독은 쿠퍼에게 끊임없이 딜레마를 제시함으로써 그의 가족애를 시험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쿠퍼가 착륙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밀러 행성의 1시간은 지구의 7년으로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행성에 발이라도 묶인다면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놀란 감독은 쿠퍼에게 '인류의 생존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전략'과 '아이들과의 재회' 중 하나만을 고르도록 강요한다. 이때, 가족이 아닌 인류를 생각해야 한다는 동료 도일의 대사와 머피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쿠퍼의 대사는 관객들에게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관객은 선택 자체는 무엇이 됐든 수긍할 수 있지만 선택에 따른 상실은 무엇이 됐든 수긍할 수 없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딜레마에서 선택은 선택하지 못한 선택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끊임없이 유보된다. 결국, 전자를 선택한 쿠퍼는 그에 따른 기회비용으로 아이들과의 시간을 잃는다. 타협이 가능하다면 딜레마는 성립될 수 없다. 이와 같은 딜레마의 절대성은 인류와 가족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론 따위는 마련하지 않을 것이라는 놀란 감독의 경고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터스텔라>에서 가족애는 선택에 따른 좌절과 후회를 통해 부각되고 견고해진다.
놀란 감독은 쿠퍼를 감정적으로 코너에 몰아붙이면서도 관객들에게 그가 무너지는 모습은 일체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쿠퍼를 서있게 하는 힘은 가족애다. 진정한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그럼에도'라는 확신 앞에 지극히 무력하다. <인터스텔라>는 아이들이 자신보다 늙어버린 비참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그럼에도' 최대한 빨리 임무를 완수해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쿠퍼의 결연한 가족애로 지탱된다. 쿠퍼의 진정한 임무는 가족을 포기하지 않음에 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현자들은 삶의 끝에 어둠이 올바름을 알지만 그들의 말이 빛이 되지 못했기에 순순히 어둠 속으로 걸어가지 않습니다.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 가는 빛에 대해.
Dylan Marlais Thomas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놀란 감독의 작품에서 인용은 항상 작품의 입장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영화에서 낭독되는 딜런 토마스의 시는 무한의 우주 공간에서 유한의 인간이 체감할 수밖에 없는 무력함을 대변하면서도 이에 대해 절대 굴복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역동적인 메시지를 함의한다. 불굴의 의지를 통한 우주 개척을 종용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놀란 감독의 작품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시에서 언급된 ‘사라져 가는 빛’이 쿠퍼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놀란 감독은 침묵을 지킨다. 그것은 인류일까, 가족일까. 그렇다면 쿠퍼는 무엇을 위해 분노하고 분노해야 하나.
이처럼 서사가 진행될수록 가족애를 증명하려는 놀란 감독의 고민은 깊어진다. 밀러 행성에 이은 만 행성에서의 플롯은 놀란 감독이 가진 고민의 과도기다. 자신의 임무가 새로운 터전으로 지구에 있는 인류를 이주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방치한 채, 우주선에 있는 수정란을 배양해 새로운 터전에 정착하는 것임을 알게 된 쿠퍼는 다시금 딜레마에 빠진다. 밀러 행성에서 인류를 선택한 것에 대한 기회비용이 자식들과의 시간이었다면 만 행성에서 인류를 선택한 것에 대한 기회비용은 자식들과의 재회로 곧, 자식들의 죽음에 대한 방관을 의미한다.
자식들의 죽음을 방관해야 하는 선택지만은 감당할 수 없었던 쿠퍼는 임무를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인류 대신 가족을 끌어안으려는 쿠퍼의 시도는 매번 제 3자에 의해 좌절된다. 우주선을 독차지해 임무를 완수하려는 제 3자인 만 박사에 의해 쿠퍼는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난다. 이후, 만 박사가 본체인 인듀어런스 호를 탈취하려다가 쿠퍼에 의해 제지당하는 씬은 영화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으로 음악 감독인 한스 짐머의 감각은 지켜보는 이의 긴장감을 점진적으로 최고조까지 고조시킨다.
이 과정에서 인듀어런스 호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지구로의 귀환은 불가능해진다. 영화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쿠퍼의 삶은 물을 마시려 고개를 숙이면 물이 입으로부터 멀어지고, 과일을 따려 손을 뻗으면 나뭇가지가 위로 올라가 영원히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저주에 걸린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탄탈로스의 삶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쿠퍼에게 가족은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 없고, 선택하려야 선택할 수 없는 영원한 미완의 대상이다. 놀란 감독이 인용한 딜런 토마스의 시 속, '사라져 가는 빛'의 의미는 관객들에게 점차 분명해져 간다.
영화는 쿠퍼의 갈증을 여전히 해결해주지 않은 채 결말을 위한 도약에 접어든다. 결말은 쿠퍼의 자기희생을 딛고 이뤄진다. 쿠퍼는 지구에 있는 인류 아니, 자식들을 구할 수 있는 핵심 단서를 찾기 위해 블랙홀에 존재하는 빨려 들어가는 순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에 기꺼이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뉴턴의 제 3법칙.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큼 무언가를 뒤에 버려야죠"라는 영화 속 인공지능의 대사처럼 쿠퍼는 자식들의 삶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미지의 우주 공간에 남겨두는 선택을 강행한다.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에요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관객도 마찬가지. 엔딩 크레딧까지 30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놀란 감독은 관객에게 여전히 기대를 품게 한다. 미지의 공간인 사건의 지평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쿠퍼의 가족애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놀란 감독은 '사랑'이라는 진부한 답변으로 두 기대를 한 번에 답하고자 한다. 영화 속 사건의 지평선은 5차원의 시공간이지만 쿠퍼 그리고,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3차원의 세계로 표현된다. 이를 한 번 더 비틀어 머피의 방에 있는 책장 뒷공간의 세계로 시각화한 점은 꽤나 독창적이다.
무한의 공간에 대한 유한의 상상력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으로부터 나아가 쿠퍼가 시간을 넘나들며 책장을 통해 무수한 시간대의 머피와 소통할 수 있게 된다는 설정에 대한 근거로 작용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쿠퍼는 머피와의 소통을 통해 과거의 자신이 임무를 거절하도록 하지 않고 임무를 수락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현재 사건의 지평선에 존재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쿠퍼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이 목적적 사고에 근거해 이뤄졌다는 의미인데 이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2017 作)과 상당히 유사한 설득력을 갖는다.
목적론적 사고를 서사의 구성 요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공통분모를 갖지만 <컨택트>와 <인터스텔라>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컨택트>에서 목적론은 이해와 수용의 측면에서 논의되지만 <인터스텔라>에서 목적론은 대안과 극복의 측면에서 논의된다. 쿠퍼는 사건의 지평선에서 인공지능이 추출한 핵심 단서를 미래의 머피에게 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류를 구출해내고 자신 역시, 사건의 지평선으로부터 빠져나와 지구를 탈출한 인류가 머무르는 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건의 지평선을 활용한 서사의 연결은 그 자체만으로는 나름 유려했고 꽤나 흥미로운 편이었지만 서사 구조 전반 자체는 아쉬운 편이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메시지와는 다르게 영화 속에서 답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 딜레마를 한 껏 꼬았다는 점에서 <인터스텔라>는 명실상부한 놀란 감독의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딜레마에 대한 결과를 풀어나가는 과정의 설득력이 전작에 비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팬으로서 갖는 약간의 애착과 아쉬움이랄까.
두고두고 기억하게 되는 엔딩을 인생 엔딩이라고들 부르는데 한스 짐머가 한껏 고조시킨 감정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인터스텔라>의 엔딩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쿠퍼가 애달픈 기회비용을 치르고 임종 직전의 노년의 머피와 재회하는 씬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쿠퍼와 머피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지만 가족으로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는 시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동료 브랜드가 말했듯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것이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가족애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더욱 끈끈해진다. 우리에게 사랑은 언제나 필연적이다.
일말의 결점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인터스텔라>는 여전히 벅차오르는 작품이다.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는 순간, 보는 이의 마음속에는 사랑에 대한 경이와 삶에 대한 희망이 함께 열거된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늘 그랬듯이. 이러한 삶에 대한 명제를 놀란 감독은 인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증명한다. 끝으로 놀란 감독은 우리에게 <인터스텔라>라는 증명식을 우리 삶에 적용시키라는 숙제를 내준다.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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