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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혼술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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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Sep 23. 2018

혼술예찬 #1: 칵테일과 최은영

 맨탈을 갈아 완성시킨 [크리스토퍼 놀란 다시 보기 #3: 덩케르크] 연재분. 제 브런치에 있으니 많이 봐주세요 ( •̀ω•́ )

 

 며칠 좀 바쁘고 또 고달팠다. 연재하는 칼럼의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글에는 진전이 없고 날씨는 부쩍 선선하고 산뜻해진 게 마치,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무작정 사람을 걷고 싶게 만들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감을 마친 오늘, 나는 나에게 '혼술'을 선물하기로 했다. 술 몇 잔이 필요한 하루였지만 구태여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하루는 아니었다. 오늘은 그랬다.

 고척 스카이돔 근처에 혼술을 위해 간혹 찾는 펍이 하나 있다. 처음 찾은 것은 작년 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마음이 심숭생숭해 무심코 취하고 싶은 날이었는데 OO비어 같은 곳에서 정신 사납게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택 장애답게 숱하게 조용한 술집을 검색해 찾은 곳이 바로 이 펍이었다. 당시에 사장님이 간지나게 섞어주는 칵테일을 홀짝이며 조용한 분위기 속에 글도 몇 자 끄적이고, 한가롭게 책도 읽던 게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반년을 훌쩍 넘겨 펍을 찾은 까닭에 사장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구태여 종종 들렀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구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준벅'을 주문했다. 준벅(June Bug). 싱그러운 초록 빛깔이 6월의 애벌레와 같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달큰향 메론과 코코넛 향이 특징인 칵테일이다. 혀가 아릴정도로 달지만 도수가 높지 않아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다. 

  

사진 촬영을 부탁드리자 흔쾌하게 응해주신 사장님. 완전 친절하시다 / 준벅 디테일 샷   


 8시밖에 되지 않았던 탓에 펍에 손님은 나뿐이었다. 준벅을 입에 머금으니 달달한 메론 내음이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퍼진다. 취기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좋다. 어렸을 적 옷장 빈 공간에 몸을 구겨 넣고 한참을 쪼그려 있었던 것처럼 나는 온전하게 혼자다. 이 사실이 나를 안도시킨다. 나에게 이만큼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모든 감정과 생각이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한다. 어떤 소설에서 그랬듯이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에게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술집과 카페의 유일한 차이점은 '잔에 차있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곳에서 누구랑 무엇을 마시든... 나는 준벅을 한 모금 더 삼키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최은영 작가의 신간 <내게 무해한 사람>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최은영 작가의 글은 항상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내 삶의 일부분을 발췌해 쓴 것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낯설지 않은 글을 쓰는데 시종일관 애잔한 슬픔이 배어 나온다. 따라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글이 아니라 내 서글픈 과거다. 울컥할 수밖에. 메론 내음에 숨어 미미하게 올라오는 취기는 나를 평소보다 감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글을 읽는 내 마음을 평소보다 울컥하게 만든다. 나는 이제 '러스티 네일'을 시킨다. 

 

아메리카노처럼 마셔대니 준벅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러스티 네일 디테일 샷


 '녹슨 못'이라는 뜻을 가진 러스티 네일(Rusty Nail)은 강한 위스키에 벌꿀을 섞어 만든 칵테일이다. 입술에 대는 순간, 위스키의 씁쓸한 맛과 벌꿀의 달콤한 향이 빛의 속도로 혀 끝에 당도한다. 몇 번 홀짝이자 준벅과는 다르게 제법 취기가 오른다.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살짝 맹해진다. 깔끔하게 취하는 느낌이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이 느낌을 누군가와의 소모적인 대화에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속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취기와 함께 독서도 무르익는다. 소설 속 한 구절이 내 마음을 때린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었을까. 이미 유해한 사람이었던 나는 무해한 사람이라며 상대방과 나를 속인 것이 아닐까. 이타적인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이기적이었구나 나는. 이타심과 이기심은 한 끝 차이라던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시기적절하게 떠오른다. 마음이 애잔하다.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


 지독하게도 감상적인 사람이 된 걸 보면 아무래도 취한 것 같다. 심하게 취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그만 마셔야 한다는 것을 안다. 혼술에도 주도(酒道)가 있다면 끝내야 할 때를 알고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내 주론(酒論)은 취한 것과는 별개로 '억지 감정에 함몰 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이다.

 마시고 싶은 칵테일도, 읽고 싶은 다른 글도 많지만 오늘이 좋은 혼술로 남아야 다음 혼술도 시도할 여력이 생기기 때문에 주섬주섬 짐을 싼다. 마신 칵테일들이 달아서 그런지 그래도 하루의 마무리가 달달하다. 오롯이 내게 집중할 수 있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타인들과 함께한 그 어떤 술자리보다도 위안이 됐던 술자리였다. 그리고 나는 좀 더 무뎌져야 할 것 같다. 내게 무해한 혼술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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