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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Aug 29. 2019

혼술예찬 #2: 자전거와 김영하

#1 자전거와 한강 자전거 길

 자전거를 탄다. 문득 걱정이 앞선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안장에 엉덩이를 걸치고 페달에 발을 굴리자 고향집을 방문한 것 같은 친숙함이 엄습한다. 10년 만에 방문해도 고향집은 여전히 고향집이고 익숙하듯, 8년 만에 타보는 자전거였지만 여전히 익숙하다.

 도시의 야경은 쉽사리 등장하지 않는다. 터널, 벤치, 화장실, 나무의 반복이다. 그럼에도 해방된다는 느낌이 선선하게 불어온다. 미지근하게 마중 나오는 바람 사이로 에어컨 공기처럼 냉한 바람이 기분 좋다.

 두 다리의 교차 작용으로 비롯되는 운동 에너지는 꽤나 정직하다. 거기엔 어떤 위선도 없고 반칙도 없다. 내가 예의 교차 작용을 멈추는 순간 자전거도 멈춘다. 게다가 혹여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염려스려 괜스레 집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전거에 올라탄 이상 나는 정직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다 보면 자전거와 내가 한 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페달로 말미암아 바퀴가 돌아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분절된 부드러움의 연속된다. 내 삶도 그럴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한다. 요행은 바라지도 않으니 자전거처럼 그저 힘을 준 만큼만이라도 나아가 줄 수는 없을까.

 한쪽 귀에만 착용한 블루투스 이어폰에서의 노래가 따갑다고 느껴질 때쯤에야 비로소 야경을 보며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코스가 등장하는데 그 지점부터는 어디서 흘러오는지 사람들이 꽤나 밀집돼있다. 야경을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하되 고독이라던지, 적막이라던지 하는 소소한 재미를 잃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인생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하는 고리타분한 삶의 교훈을 떠올린다. 나는 이러한 페달질을 통해 삶을 한탄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느낀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테지만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2 김영하 <오직 두 사람>과 세 칵테일(블루 사파이어, 러스티 네일, 와일드 플라워)

  단언컨대 이 소설은 내 이해의 영역 바깥에 위치한 듯하다. '상실'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어쭙잖게 아는 척을 할 수야 있겠지만 나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가 없다. 김영하란 작가의 글은 때때로 난해하다. 우울하다 못해 암울하다. 아니, 침울하다. 이 세상 모든 불행은 이 소설이 끌어안은 것만 같다.

 그런데 난 여기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고리타분한 삶 속에서 내 인간성과 영민함은 나날이 침전해만 가는데 이 소설이 보여주는 대책 없는 불행담을 칵테일을 삼켜가며 보노라면 역겹게도 내가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그러니까 투정 좀 그만 부리라는 자책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이렇게 치졸한 방법으로 밖에 위로받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는 것일까.

 소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이 이렇게 불행한데 도대체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우리 삶이 김영하의 소설보다 불행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약자처럼 보인다. 마지막 에피소드에 비꼼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초긍정의 힘'처럼 그무책임한 감정 따위는 엑스터시와 별반 다를게 없다. 대책 없고 위험하다.

 우리 삶은 김영하 소설의 제목처럼 오직 두 사람이 아니다. 결국은 철저히 나 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실존주의에서 주구장창 주장하듯 우리 삶이 엿 같은 건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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