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의미 없는 동작에 불과했던 대상에게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꽃이 됐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 늘상 떠오른다. 작품은 보는 이의 개별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그 존재 의의를 인정받는다. 어떤 의미가 부여되느냐에 따라 작품의 정체성은 상이해진다.
현대미술에서 작품을 '작품'이 아니라 구태여 '오브제(object)'라고 명명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오브제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사물에 일반적인 개념 대신에 다른 존재 의미를 부여한 물체를 지칭한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 우리에게는 가장 익숙한 오브제일 것이다.
예술을 구태여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대미술에서 작품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상대주의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난해, 단순, 독창의 영역을 제멋대로 오가며 설치, 제작된 하이메 아욘의 오브제를 감상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든,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게 되든 오브제를 인지하고 교감하는 찰나에 그 의의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 찰나에 '현실의 문제'라던지 '삶의 정수' 따위를 곱씹어보게 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전시장의 테마는 'Crystal Passion'으로 크리스탈과 세라믹 서로 다른 두 물질로 만들어진 장식용 화병들이 전시돼있다. 각각의 화병들은 파인애플, 골프공을 본떠 만든 형태인데 정교한 조각 작업을 거쳐 마치 보석처럼 보인다.
일련의 정보를 통해 나는 '서로 다른 물질이 결합함으로써 여타 물건들을 품어낼 수 있다는 화합과 포용의 가능성' 혹은 '일상의 소재를 마치 보석처럼 빚어냄으로써 강조되는 일상의 진귀함'따위를 생각해본다.
미술관에서 나와 헛헛한 마음에 국립 고궁박물관 벽담 길을 마주 보고 있는 펍에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헝가리 굴뚝빵과 클라우드 한 잔을 주문하고 각종 포스터와 술병, 장식물로 도배된 회반죽 벽을 지나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밝은 와중에도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눈 앞에 보이는 가로수, 벽담 길이 때마침 운치를 더한다.
나는 중, 고등학교를 대안학교를 다녔다. 학생수 100명 남짓한 그곳에서 철학, 인문학, 사회학, 생태 따위를 배웠다.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오늘 집을 나설 때, 내 모교를 창설하시고 초기 교장을 맡으셨던 은사님의 시집이 눈에 유독 밟혀 챙겼는데 혼술을 하며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삶은 언제나 의외다.
시들은 참 정직했고 허례허식이 없었다. 그중에서 <희망>이라는 시가 유독 가슴에 읽힌다. '애쓰지 않아도 새벽이 온다고 말하지 마라'라는 결연하고 엄중한 문장으로 운을 떼는 이 시는 동두천 양공주, 흑산도 작부로의 사람들부터 시작해 에이즈 감염자, 네 살배기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에 이르기까지 삶이 결코 쉽지 않았을 이들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
그들에게 '그럼에도 내일과 새벽은 온다'는 위안을 건네기에 우리는 그들 삶의 상처와 고통에 너무도 무지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는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너무도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꿈꾸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대자연의 관습에 따라 내일은 다가오고 새벽은 밝아오겠지만 정작 중요한 희망이 결여돼 있는 그 전제는 그들에게 있어 단순한 셈법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이 삶의 가장 극악한 순간일 사람들에게는 은사님이 시에서 읇조리시듯, '어떤 이가 끝내 이뤘다고 하는 천국'도 '어떤 이가 다 비웠다 말하는 무욕'도 기만과 위선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국과 무욕을 기꺼이 택할 수 있는 이들이 털어내는 알량한 부스러기가 그들에게는 은사님의 표현처럼 '비견할 데 없는 행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가슴을 때린다.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 노력해도 현실의 한계에 스스로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어른들이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의 맥주는 유난히 끝이 쓰다. 선생님의 시는 분명 따듯한데 내가 직면한 현실이 너무 차가워서 마음이 시리다. 오늘의 술자리는 혼술예찬이 아니라 '혼술자조'인걸까. 펍을 나오며 나는 희망과 <희망>을 생각한다.
<희망>
애쓰지 않아도 새벽이 온다고 말하지 마라
두더지처럼 지하에서만 살아야 하는
얼굴 지워진 존재들이 도처에 있는데
동두천 양공주에서 청량리 거쳐 흑산도 작부로까지
할미, 어미, 딸 3대 모계로만 이어진 고름투성이 생명줄에
스물넷 에이즈 감염자 죽음 앞에서
꿈꾸지 않아도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봄이
수억 번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한들
네 살 먹은 딸아이 홀로 두고서
차마 어려운 길 가야만 하는데
애달파하지 않아도 아침이 오고야 만다고 말하지 마라
어떤 이는 다 이루었다 천국을 말하고
어떤 이는 다 비웠다 무욕을 말하는데
천국과 무욕의 그림자 부스러기만 스쳐도
그것이 우리에겐 밥이 되고 거처가 되고 약이 될 텐데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외로움을 덜어 내며
비로소 마음 놓고 죽음을 두려워하다
네 살배기 딸아이 두고서도 먼 길을 갈 수 있을 터인데
김창수 시집 < 꽃은 어디에서나 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