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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Jan 16. 2017

<어나더 어스> 리뷰

저 별이 나를 용서해줄 수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 넓은 우주에 다른 내가 존재할 것 같다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영화 ‘어나더 어스’는 도입부에 다른 지구의 등장을 시사하며 관객들의 기대감과 상상력을 한껏 고조시킨다. SF영화의 전형 같은 플랫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장르는 ‘드라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와 똑같은 지구의 존재는 영화가 내포하는 상징성에 관여할 뿐 화려한 볼거리나 극적인 연출과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제목과 설정의 배신(?)이라 느낄 수 있지만 영화의 진짜 필드인 ‘드라마’에 입각해서 관람한다면 음울함과 절제미(美)가 돋보인 썩 괜찮은 영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나더 어스>의 핵심 키워드는 ‘속죄’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사건의 발생을 기점으로 막을 연다. 당시 17살이었던 주인공 로다의 음주운전으로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존은 가족을 모두 잃는다. 출소 후, 죄책감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로다는 인근 학교의 청소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존을 발견한다. 홀로 폐인으로 살아가는 그를 돕기 위해 로다는 무료 청소부 인척 가장하고 매일 그의 집을 청소한다. 사실을 모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비정상적인 공존. 로다는 매일 존에게 그날의 일을 사죄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하지만 차마 하지 못한다.


어느 날 등장한 다른 지구처럼 갑작스럽고 위태로운 로다와 존의 공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죄책감에 시달리는 로다는 다른 지구, 다른 삶으로 떠나기를 갈망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로다의 삶은 그녀가 저지른 인과율을 영원히 공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출소 후 폐인처럼 지내는 존을 보고 충격을 견디지 못 한 로다는 옷을 벗고 눈 덮인 들판에 누워 차가운 죽음을 기다리지만 이내 구조되고 만다. 그녀가 치러야 할 속죄의 무게는 동상에 의한 죽음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주인공 로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만큼 관객은 그녀의 시선에 동화되고 그녀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관용적으로 보게 된다.

 세상에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잘못들이 있다. 로다의 음주운전 역시 그 범주 안에 속했다. 일순간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심정은 세상에 있는 어떤 단어로도 담아내지 못할 만큼 처절하다. 그러나 영화는 짓궂다. 로다가 가해자인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존은 로다와 사랑에 빠진다. 로다 역시 사랑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감정에 도덕적 판단을 상실한다. 영화는 마치 오이디푸스의 비극처럼 도저히 해피엔딩으로 나아갈 수 없는 설정을 관객에게 던지고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99%의 비극적인 결말과 1%의 희극적인 결말 가능성 속에서 속죄는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한 우주비행사가 우주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계기판이 망가져 ‘탁.. 탁’하는 소리가 몇 날 며칠을 우주선을 맴돌았다. 소음에 의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비행사는 결국 그 소리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자 소음이 멈췄다. 그 순간부터 음악이 됐으니까..."     


 로다에게 속죄의 의미 역시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녀의 속죄는 값을 지불하고 그 순간 끝나는 흥정이 아니라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마음의 짐이었다. 다른 지구로 도망가기에는 양심이라는 중력이 그녀를 끊임없이 잡아당기고 있던 것이다. 조금씩 선명하게 다가오며 그 존재를 각인시키는 다른 지구는 그녀에게 ‘저 별에서 나는 내가 했던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겠지’하는 자조적인 상상과 더불어 자신이 처한 죄책감의 늪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행성 간에 질서를 유지시키는 인력과 척력처럼 로다를 잡아당기면서도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로다는 결국 용서받지 못했다. 대신에 그녀가 얻게 된 다른 지구로 갈 수 있는 티켓을 존에게 주며 그와의 이별을 고한다. 그 지구에서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는지 확실하지도 않고, 존이 2 명인 데서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로다에게는 그 선택이 존의 상실감을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다른 지구에게 양심의 가책을 조금 덜어냈을 뿐 로다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었다. 잘못과 용서를 가로지르는 속죄.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잘못들과 죄책감들은 마치 지구에 있는 공기처럼 피할 수 없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4년이 지난 후 조금은 밝아 보이는 로다의 앞에 다른 지구의 로다가 찾아온다. 솔직히 나는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다른 지구에서는 로다와 존의 관계가 바뀌었다는 의미인지, 다른 지구의 로다는 죄책감을 피해 자신이 도망을 왔다는 의미인지. 시작부터 끝까지 종잡을 수가 없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암울한 영화라니. 영상의 전체적인 색조차 차가운 느낌으로 물들어 있었다. 굳이 정리해야 한다면 기존에는 없던 방식으로 속죄의 의미를 고민하게 하는 작품. 나도 어디엔가 내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다른 지구가 있기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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