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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Oct 15. 2018

[부산국제영화제 특집 리뷰]엄마와 나:미움받아도 괜찮아

맥락 없는 서사에 덧씌워진 너무 쉬운 결론. 그리고 계속되는 감정의 과잉

제목: 엄마와 나(미움받아도 괜찮아) 2018 作

감독: 미노리카와 오사무

출연: 타이가(타이지 役), 요시다 유우(미츠코 役), 모리사키 원(키미츠 役)

#1시간 44분 #모자 #가정폭력 #<엄마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실화 #우타가와 타이지 #용서


<엄마와 나>는 서사와 주제의식에 있어 지극히 안일한 영화다 [사진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개인적으로 '안일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안일한 영화는 보통 메가폰을 잡은 감독에 의해 두 부류로 나뉜다. 주제의식이 갖는 호소력을 맹신해 주제의식을 '수박 겉 핥기'식으로 다루는 부류가 있고, '이 정도면 관객들이 이해해주겠지?'라는 막연한 신념으로 서사 개연성을 무시하는 부류가 있다. 어느 부류든 관객으로부터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미노리카와 오사무 감독의 <엄마와 나: 미움받아도 괜찮아>(이하 <엄마와 나>)는 두 부류 전부에 속한다. 이를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우타가와 타이지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엄마가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학대받고 불행한 나날을 보낸 아들이 참다못해 가출을 하고서도 한참 동안 어머니를 원망한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됐을 때, 결국은 어머니에게 원망 대신 사랑을 주기로 마음먹고 행동함으로써 행복한 모자가 됐다는 내용. 쉽지 않았을 용서와 용기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됐을 이 이야기는 영화화됨으로써 고유의 고민과 감동을 잃었다. 남은 건 '서사와 감정의 억지'뿐이다.   

 미노리카와 오사무 감독은 영화의 시작부터 서사를 뚜렷한 근거 없이 극단으로 몰고 간다. 유치원생 타이지는 어머니 미츠코에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엄마가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사라질까 봐 무서워"라며 애정을 놓지 않는다. 영화 초반 내내 반복되는 이와 같은 프레임은 서사에 대한 이해로 발전하지 못하고 불편함과 안타까움에만 머문다. 그 불편함과 안타까움은 표면의 정서적 반응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타이지라는 절대적 선과 미츠코라는 절대적 악이 각인되지만 이 극명한 대립은 맹목적이기만 하다.


영화의 서사가 변수에 의존할수록 개연성과는 멀어진다 [사진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에서 '대립'은 그 자체로 하나의 '떡밥'이다. 관객은 항상 대립에 대한 해결을 요구한다. 따라서 대립의 양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대립의 해결 과정이다. <엄마와 나> 속, 대립의 해결 과정은 너무도 안일하다. 타이지의 절친한 친구 키미츠는 타이지가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매번 그의 앞에 나타나 조언자 역할을 수행한다. 원작자 우타가와 타이지가 시사회에서 밝혔듯 그가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돌리는데 좋은 친구들의 역할이 컸다고 할지라도 미노리카와 오사무 감독이 이를 다루는 방법은 더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서사의 측면에서 키미츠의 등장은 일종의 '변수'인 셈이다. 서사가 명확한 방향성 없이 이러한 변수에 의해서만 전개되니 개연성이 존재할리가 없다. <엄마와 나>에서 서사의 동력이 되는 것은 변수뿐이다. 변수의 클라이맥스는 타이지가 지인의 조언으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바꾸기로 결정하는 씬이다. 지인과 마주한 자리에서 지인이 느닷없이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동요를 흥얼거리자 타이지는 이내 따라 부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이 맥락 없는 전개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러나 결정타는 그 직후의 씬에서 이뤄진다.

 지인이 "이해는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하는 거야"라고 말하자 타이지는 완전히 깨달은 제스처를 취한다. 지나치게 오래, 그리고 극단적으로 묘사된 어머니와의 대립이 2분 채 되지 않는 씬으로 와해됐다. 원망 이전에 존재한 것이 사랑이라고 해도, 십수 년을 지배한 원망이 누군가의 조언으로 스위치 켜듯 사랑으로 바뀔 수가 있을까. 원작자 우타가와 타이지가 언급했던 친구들의 조언은 그의 실제 삶에서는 큰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관객에게는 이 맥락 없는 서사가 낯설다.


영화가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건네는 건 일그러진 위로뿐이다 [사진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미노리카와 오사무 감독은 서사의 거친 면을 모정(母情)으로 무마시키려 하지만 그럴수록 서사는 더 거칠어진다. 전개가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관객들에게 울음을 강요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들에서 종종 오열을 하는 타이지의 모습이 그렇다. 이와 같은 감정의 과잉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모자의 대립은 타이지가 빚더미에 앉은 미츠코에게 파산을 설득하는 과정과 결부됨으로써 해결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싶을 텐데 영화를 보는 내 심정도 그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영화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미츠코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이는 것은 타이지였고 그런 타이지의 애정을 귀찮게 받아들이는 것은 미츠코였다. 모자간의 역학관계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미츠코는 타이지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견고하고 비뚤어진 이 역학관계에서 변한 것은 타이지의 마음뿐이다. <엄마와 나>가 불편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모자관계라고 할지라도 가정폭력이 명백하게 개입된 상태에서 피해자인 타이지에게 마음가짐 운운하며 조건 없는 애정과 호의를 베풀라고 하는 영화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더 거슬리는 건, 맥락 없는 전개와 피해자에 대한 이해 없이 짜인 주제의식으로 구성된 이와 같은 서사가 종래에는 '따듯한 힐링 가족 드라마'로 포장된다는 사실이다. 어쭙잖은 위로는 당사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배려와 위로는 그래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엄마와 나>는 그러지 못했기에 관객에게 감동 대신,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한 상영작 중, 가장 아쉬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주제의식에 대한 보다 신중한 접근을 기대해본다.


*칼럼 속 비판은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비판일 뿐, 우타가와 타이지 작가의 삶에 대한 비판이 아님을 우선적으로 밝힌다. 타인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정식 연재: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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