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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Nov 10. 2018

<청설> 이해와 사랑에 대한 이토록 순수한 단상

때로는 어설프게 그리고 때로는 진중하게. 그렇게 오래도록.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제목: 청설(Hear Me. 2009 作) - 2018.10.08. 재개봉

감독: 청펀펀

출연: 진의함(양양 役), 평위엔(티엔커 役), 천옌시(사오펑 役)

#1시간 49분 #재개봉 #대만 #사랑 #순수 #아쉬움 #수화 #가족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설프리만큼 순수한 그때의 영화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작품성과는 별개로 영화 자체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가 있다. <청설>이 그렇다. 첫 고백처럼 어설프지만 진심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조목조목 들여다보면 인물들의 마음이 그리고 대사가 얼마나 아기자기하고 어여쁜지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청설>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참 이쁜 마음이다. 청펀펀 감독은 그 마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라는 준비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람에 따라 사랑의 언어는 상이하겠지만 언제나 기본 문법은 '이해와 배려'인 셈이다. 

 <청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대부분 수화를 통해 이뤄진다. 바로, 주인공인 양양과 그녀의 언니 샤오펑 그리고 양양을 좋아하는 티엔커가 수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육성을 통한 대화는 눈을 감고 있어도,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상대방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와 다르게 수화를 통한 대화는 상대방의 눈과 몸짓에 온전하게 집중해야만 그 의사를 파악할 수 있다. 목소리가 제공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대화에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는(물론, 자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때문일 것이다. 오가는 건, 목소리가 아닌 진심이다.

 영화의 제목 聽(들을 청)說(말씀 설)을 직역하면 '내 말을 들어줘', '나를 받아들여줘' 정도가 될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달라고 표현되지 않는 진심으로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그러나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게 성사되지 않는다. 방법을 몰라서일 수도 있고, 그만한 공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서로의 진심과 진심이 엇갈리는 변곡점에서는 파생되는 후회, 실망, 상처와 같은 감정의 파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로 쌓인다. 


다른 형태의 사랑 그러나 하나의 진심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청설>에는 세 가지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 연인 간의 사랑(양양 - 티엔커), 자매간의 사랑(양양 - 샤오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티엔커 - 티엔커의 부모). 이들이 구사하는 사랑의 언어는 다르다. 양양과 티엔커는 연인 간의 사랑에 있어 당김과 미룸을 말한다. "네가 널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가 널 생각하게 되잖아"라는 티엔커의 투명한 고백(당김)과 '청각장애를 딛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양양의 불안한 고민(미룸). 정리되지 않는 고민과 감정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은 우여곡절 끝에 더욱 뚜렷해진다. 

 청펀펀 감독은 양양과 티엔커의 감정선을 통해 연애에 있어 '보고 싶으면,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면 사랑'이라고 단순하게 답을 내린다. 사랑이 자로 잰 듯 그렇게 반듯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영화에서는 그렇다. <청설>이 많은 관객의 마음에 그렇게 편안하게 안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와 같이 단순함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순수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양양과 샤오평이 보여주는 자매간의 사랑은 다른 궤도의 사랑을 말한다. 흔히들 사랑은 끌어안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놓아주는 것도 사랑의 한 범주에 속한다.

 양양에게 샤오펑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일도, 사랑도 희생하고 포기하지 말고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 달라고 부탁한다. 모든 사랑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응원하는 것. 양양과 샤오평에게 사랑의 언어는 한 걸음 물러남이다. 한편,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완만한 평생선의 사랑이다. 티엔커의 부모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티엔커에게 어떻게 사랑을 전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지만 티엔커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은 없다.


순수하다면 순수했고 단순하다면 단순했을 진심의 잔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세 가지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다. 서로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해 오해하고, 허둥대고, 상처 받지만 그 모든 방향이 상대에 대한 이해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청설>에는 순수하다면 순수했고, 단순하다면 단순했을 이와 같은 진심이 잔존한다. 그에 더해 대만 영화 특유의 분위기는 <청설>에 대만 영화 특유의 정서와 감정을 불어넣는다. 그럼으로써 <청설>은 완성되고 관객들의 마음속 영화 서랍장에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와 같은 작품으로 분류되며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되는 건 작품의 정서뿐이다. 작품 자체는 얼기설기 짜인 느낌이 강하다. 특히, 마지막의 반전을 위해 초반부터 억지 설정을 밀어붙이는 것이 뻔히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청펀펀 감독이 그렇게 가져오고 싶어 했던 반전이 서사 전개에 있어서도 작품 정서에 있어서도 마냥 엉뚱하게만 느껴져 합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티엔커가 양양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며 갑작스레 삽입된 요란한 사운드에 맞춰 코피를 흘리는 씬에서는 '이러지 말지'하며 인상이 구겨지기도 했다. 

 작품성과 작품의 정서 사이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몰라 아직은 그 판단을 유보하고 싶게 되는 영화다. <청설>은 이처럼 이해와 사랑이라는 주제의식 그리고 작품마저도 이토록 단순하고 순수한 영화다. 어설프고 또, 진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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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연재: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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