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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Nov 14. 2018

<영주> VS <어나더 어스>
무엇이 다른가?

영화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존을 다루는 방식과 그 차이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제목: 영주

감독: 차성덕

출연: 김향기(영주 役), 김호정(향숙 役), 유재명(상문 役), 탕준성(영인 役)

#1시간 40분 #용서 #공존 #딜레마 #진심 #비극 #가족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로 22일 개봉 예정인 <영주>를 미리 만나볼 수 있었다. 울컥하리만큼 가슴 먹먹하게 하는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영주>가 갖는 서사적 힘은 비극적 딜레마로부터 비롯된다. 주인공 영주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그녀가 14살 때, 동생 영인만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인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이다움을 거세하고 어른스러움을 스스로에게 강요해야만 했던 영주. 출구 없는 절망의 늪에서 영주는 원망의 심정으로 부모님을 죽게 만든 가해자 '상문'을 찾아가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영주>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공존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게 위로가 돼준다. 그런데 이 레퍼토리 뭔가 낯설지 않다. 2011년 개봉한 마이클 차힐 감독의 <어나더 어스>는 <영주>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나더 어스>의 주인공 로다는 음주운전으로 가장인 존만을 남겨두고 그의 아내와 딸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4년의 복역을 마친 후, 그녀는 용서를 구하기 위해 존을 찾아가지만 폐인처럼 지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죄책감으로 무너져버린다. 로다는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무료 청소부라 속이고 주기적으로 그의 집을 찾아간다.  


https://brunch.co.kr/@inu-ssw/8  

<영주> 스틸컷. 영주와 향숙의 모습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주>와 <어나더 어스>는 하나의 데칼코마니 같다. 피해자가 교통사고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괴로워하는 설정뿐만 아니라 인물을 딜레마로 유입시키는 과정 역시 닮아있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영주>는 피해자의 시선을, <어나더 어스>는 가해자의 시선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두 영화가 어려운 이유는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해 '선과 악'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편리한 이분법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음에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저마다의 사연과 슬픔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함부로 손가락질할 수 없게 만든다.

 인물 판단에 대한 유보가 길어질수록 딜레마는 더욱 꼬여간다. 원망의 심정으로 가해자 상문이 일하는 두부가게를 찾아간 영주는 로다가 그랬듯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다고 말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이뤄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문과 그의 아내 향숙은 영주에게 사뭇 살갑게 굴며 영주를 어른이 아닌, 아이로 봐주는 유일한 어른이 돼준다. 향숙은 손님들에게 영주를 자신의 막내딸이라 부르고 저녁 식사에까지 초대하는 등 지극한 모성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어나더 어스> 스틸컷. 로다와 존의 모습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주>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가족이 되고 <어나더 어스>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연인이 된다. <어나더 어스>에서 존은 무료 청소부라 자기를 소개하며 그의 삶에 불쑥 끼어든 로다에 대해 처음에는 경계심을 갖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두 영화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존을 점차 간절한 것으로 엮어낸다. 서로가 서로의 심적 공백을 메워나가는 과정을 진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사고 회로를 정지시킨다. 자신의 가족을 죽게 한 가해자와의 공존과 자신이 가족을 죽게 한 피해자와의 공존. 이 공존은 무력하다.

 두 영화는 피해자들이 보여주는 상처만큼이나 가해자들이 보여주는 죄책감도 뚜렷하게 보여준다. 상문과 로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있어 어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각각의 영화는 두 사람의 자살을 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의 지표로 활용한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다른 국면의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자살을 하려는 상훈과 로다의 시도를 속죄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이 속죄라고 한다면 그들에 의한 공존은 비로소 허락될 수 있을까. 두 영화는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난제를 제시한다.


영주와 로다의 유약한 희망은 영화를 한없이 위태롭게 만든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주와 로다 역시, 이 관계가 간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의 마지막, 어떻게 부모님을 죽인 가해자들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냐며 화를 내는 동생 영인에게 영주는 "그 사람들은 내가 좋대. 내가 기특하대. 그래서 나 힘든 거 도와주고 싶대"라고 말한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에게서 행복을 바라는 영주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그래서 한없이 막막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죄책감으로 시작한 감정이 사랑으로 번져버린 로다의 마음을 보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영주와 로다가 관계를 붙들고 있는 모습은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보는 아이의 뒷모습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니, 언젠가는 꼭 넘어져야 할 것처럼. 그래서 두 사람은 넘어진다. 영주는 자신이 피해자임을, 로다는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한다. 그들의 고백은 끝이 아닌, 시작을 위한 것이기에 더욱 슬플 수밖에 없다. 고백하는 순간, 죄책감 혹은 분노로 그들은 버림받을 것이 너무도 당연하기에. 영주와 로다는 다시 혼자가 된다. 처음부터 끝이었던 그들의 관계는 영화가 끝남에 따라 비로소 끝이 난다.

  



 <영주>와 <어나더 어스>는 잘못된 걸 알면서도 묘하게 응원되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들의 관계가 너무도 당연하게 끝으로 돌아갔을 때 조금의 상실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각각 다른 소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두 영화는 신기하게도 정확하게 같은 주파수로 관객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렇기에 두 영화 모두 나름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목에 'VS'를 끼워 넣은 만큼 글쓴이로서는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굳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나더 어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영주>는 서사 전개에 있어 다소 거친 부분이 많이 보인다. 상황과 정서에 대한 비논리적인 도약이 종종 발견되고는 한다. 서사적 공백이 생각보다 커다래서 영화가 더 많은 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차곡차곡 서사를 쌓아갔다면 보다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는 명확하게 남는다. '어른 아이'를 담아내는 김향기의 연기는 영화를 지탱하는 구심점이 된다. 특히나 그녀가 서러움을 꾹꾹 눌러 담아 연기하는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다.

 작품성과 별개로 <영주>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영화다. 대거 양산되는 상업 영화들보다는 당신에게 가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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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연재: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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