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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영 Sep 08. 2017

엘르

형용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전반을 감싼다.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강렬한 영화이다. 암전 된 상태에서 비명과 신음이 교차하는 이상한 오프닝은 관객들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궁금증과 끔찍한 장면 사이에서 경악과 탄식이 흘러나올지 모른다. 일련의 사건들이 끝난 후 주인공 '미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입고 있던 옷을 버리고 깨진 유리잔을 청소하며 더럽혀진 몸을 씻어낸다. 강간을 한 '남자' 못지않게 이 여성의 뒷수습을 하는 모습 또한 만만치 않다. 그렇게 시작하는 '엘르'는 끝날 때까지 예측을 넘어서며 전개된다.



작년 칸 영화제에서도 충격과 화제를 낳으며 많은 이슈가 되었던 폴 버호벤의 '엘르'(6월 15일 개봉작)는 이야기에서든 형식적인 측면에서든 무시무시한 걸작이다. 프랑스 대표 작가 필립 지앙의 '오...(Oh...)'를 원작 삼아 각색해 만든 '엘르'는 영화 바깥에서도 말이 많았다.(참고로 필립 지앙의 소설 '오...'는 국내에 출판되지 않았다.)제작 들어가기 전부터 투자자나 배급사에서 시나리오를 보곤 난색을 표시하며 작품 만들기를 꺼려했고 미국의 수많은 톱배우들에게 각본이 갔지만 섣불리 하려 하는 배우들이 없었다. 곤경에 처해있을 때 이자벨 위페르가 이 시나리오에 관심을 보였고 할리우드에서 만들려 했던 폴 버호벤은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 작품을 만들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온갖 금기시되는 행동들이 다 나온다. 폭력은 기본에 강간, 불륜, 사디즘과 마조히즘까지 난색을 표시할 만한 표현과 소재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 전반을 감싸고 있는 어두운 기운들은 영화가 내뿜고 있는 에너지와 이야기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이다.


게임회사 대표인 '미셸'은 어릴 적 트라우마(혹은 씻지 못할 기억)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몇십 년 전 마을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아넣었던 연쇄살인마의 딸이라는 점이다. 점심을 먹으며 전화하고 있다 난데없이 '쓰레기'라며 음식을 쏟아버리는 상황에서 알 수 있듯 '미셸'은 평생 주위의 시선과 고통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강인하게 대처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이 여성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취해야 하고 행동하며 살아왔는지 오프닝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가 있다. '미친놈 해결하는 건 내 전공이다.'라는 미셸의 말은 단순히 허세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여성은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삶 전체를 그렇게 행동하며 주체적으로 살아왔다.



폴 버호벤의 전체적인 연출은 그의 전작들과 비교를 해도 흥미로울 것이다. 초창기 때부터 모호하게 작품을 만드는 것을 즐겨했던 버호벤은 인간의 검은 욕망과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던 상징들로 기이한 에너지를 내뿜었던 '포스 맨', 표현 방식과 성격에 있어서는 '원초적 본능'과 유사해 보인다. 그의 전작들이 대게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엘르'가 왜 가장 뛰어난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형용할 수 없는 어떤 현상과 인물들을 가장 기이하면서 현실적으로 조율해 한 편의 우화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놀랍다는 점이다.

한 예로, 버호벤의 '포스 맨'은 이상하리 만치 난잡한데 일부러 평론가들을 골탕 먹이려고 아무런 의미 없이 표현하고 만들었다는 일례가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포스 맨'이 놀라운 점은 그런 난잡함과 모호함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핵심 또한 그 점에 있다. 아무 이유가 없어 보이고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세계에 대한 모호한 시선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기운의 종착지는 '죽음'이라는 데에서 섬뜩함과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유머 또한 '블랙'이다.)사디즘 성향의 '이웃집 남자', 연쇄 살인마의 딸,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그 사디즘 성(性)향을 가지고 있던 이웃집 남자의 죽음, 친구 남편과의 섹스, 아들이 낳은 자식이 검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라는 점, 면회하려 했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 모든 것들은 설명하지 않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의 연속이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온전히 자신이 주체적으로 일어서며 행동하는 인물은 '미셸' 한 사람뿐이다.(소설에서는 에이전시 대표로 나왔던 '미셸'이 각색 과정에서 게임회사 대표로 바뀐 점은 의미심장하면서도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연상호 감독의 단편 '지옥 - 두 개의 삶'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천사에게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선고 또한 무척이나 아이러니 한데 지옥을 면하기 위해 지옥 같은 삶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우화는 연상호 감독의 무섭도록 염세적인 시선이 '엘르'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어쩌면 삶 자체는 고통이자 지옥의 순행 길일지 모른다는 연상호 감독의 염세적 비전이 '엘르'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자벨 위페르는 지난 수십 년간 유럽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위대한 배우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동시에 많은 여배우들의 롤모델이며 그녀의 위대함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만약, '엘르'에서의 연기를 이자벨 위페르가 하지 않았다면 많은 부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버호벤의 인터뷰에서는 각본과 연출상 다른 지점이 있어도 이자벨 위페르의 본능과 연기에 자연스레 맡겼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미국에서 그 많은 배우들과 투자자들에게 외면당했던 '엘르'가 오히려 이자벨 위페르라는 배우를 만나며 더욱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살려냈을지도 모른다.


'엘르'에서 보인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와 미아 한센-러브의 '다가오는 것들'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있다. 방법론과 표현에서 '피아니스트'가 비슷하다면 주체적이고도 위엄을 보여주는 면은 '다가오는 것들'과 유사하다. '엘르'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잡은 중심은 아마도 강인함으로 보인다. 그 많은 시간 동안 겪어온 시련과 아픔을 생각해보면 이 여성에게 삶은 강인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병실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장면이 단 한 컷도 없다.(그 장면 또한 살짝 흔들리는 모습이다.)이 여성에게는 영화 안쪽으로나 바깥으로나 비범함이 묻어있다. 대단한 연기를 시종 보여주는데 그런 여배우가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아카데미 할 때는 엘르를 보기 전이었기 때문에 '나탈리 포트만'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통틀어 '이자벨 위페르'가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죽음의 기운이 깔린 세계에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세계에서는 이유가 없으니 인간의 의지와 무의지에 맡긴 채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까. 예술에서는 언제나 정확한 답이 없다.(오로지 질문이 강할 뿐이다.) 해석의 자유는 무한대이니 생각의 자유 또한 무한대이므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버호벤 역시 모호하게 만들었으므로 '이 영화의 상징이 이러하니 이 장면의 의미는 이러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그런 영화였으면 걸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런 난잡하고 예측을 넘어서는 작품을 이상하리 만치 서스펜스를 가지고 훌륭하게 균형을 맞춰 만들었다면 걸작이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영화의 오프닝과 마지막을 생각해보자. 암전 되어 있던 상태에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던 장면은 화면이 비치자 '미셸'이 마치 죽은 시체처럼 누워져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미셸이 키우던 고양이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엄마, 아빠가 안치되어 있는 묘지에 들어가 있다. '엘르'에서의 인물들은 '미셸'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위탁되어 있거나 도움을 받고 있다.


'패트릭'의 아내 '레베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고 '레베카'는 '힘든 시간을 이겨내라고 종교가 있는 거죠.'라 말하며, '그가 필요했던걸 당신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사하실 거면 도움될 전화번호 드릴까요 라는 말에 미셸은 '이사 안 가요'라고 말한다.


엔딩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카메라는 묘지 전체를 비춰 안 나와 미셸이 걸어가면서 카메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끝나게 된다. 인물이 죽음을 맞이하며 비로소 평안을 찾을 때 미셸은 유일하게 죽지 않고 꼿꼿이 주체적으로 평안을 되찾았다. 묘지 한가운데 걸어가며 전체를 잡는 씬은 '다가오는 것들'의 마지막 장면과 겹쳐진다. 이 영화 또한 삶 전체를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한다. 미셸은 묘지에 둘러싸여 그 길을 완전히 나오지 못했다. 허나, 지옥과 검붉은 색이 뒤덮이고 뒤틀린 세상에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의 위엄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말년에 나온 버호벤의 이 '엘르' 역시 쉽게 나올 수 없는 걸작이다.




★★★★★




정보 : 네이버 영화

사진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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