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이후 오랜만에 만난 팽팽하고 진진한 사극 드라마.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지난 십여 년 넘게 충무로에서 사극 드라마가 뛰어난 성과를 거둔 영화들은 많지가 않다. 스펙터클한 액션을 보여줄 것인가, 눈을 번쩍이게 할 시각적 쾌감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퓨전 사극으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뽑아낼 것인가. 이미 충무로는 '왕의 남자'가 찍어놓은 정점에서 아직까지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올해 나온 '남한산성'의 등장은 이 모두를 충족시키고도 아직 중요한 지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법과 힘이 이 영화의 진짜 중요한 지점이다.
1636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은 단 5일만에 한양에 도달하고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조정과 임금은 청의 군사 때문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살과 뼈가 얼어붙을 추위, 배가 등가죽에 붙을 굶주림 그리고 절대적인 청의 군사력 앞에 남한산성에 포위되고 만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싸워 '대의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 청의 압박은 점점 거세지고 인조의 고뇌가 깊어져 갈수록 결단도 쉽지 않다.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남한산성'은 이처럼 시놉시스의 얼개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구조이다.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이 이야기의 힘을 더 실어주고 있지만, 문학을 영상으로 옮길때의 고민 또한 만만치가 않다. 특히 사극은 일반적인 장르보다 훨씬 힘들고 까다롭다. 그 반증은 충무로에서 나온 사극영화만 보아도 알수 있을 터. 이준익 감독을 제외하고는 사극 드라마를 제대로 구현해낸 자가 많지 않다. 그러니, 영화가 좋게 나온 것은 원작의 공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법. 황동혁 감독의 야심이 곳곳에 보인다.
영화의 형식과 구조를 보았을 때는 명확하고 또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마치, 소설의 '장'이나 연극 '막' 처럼 이야기 구조를 짜고 있으며 영화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객들이 쉽게 접근하고 따라올 수 있겠금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았을 때는 영화 전체가 하나의 '트리트먼트'와 '스토리 보드' 심지어 '시나리오'까지 철저하고 명확하게 구분되어져 있는 것이 보일 정도 이다.
'예조판서'와 '이조판서'의 대립은 이 영화의 핵심이자 큰 중심축이다. 다른 사극영화였으면 이 둘의 대립을 역사적 결과아래 '성공'과 '실패'의 요인으로만 나누거나, 전투씬의 스케일 비중을 크게 두어 자충수 그 자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남한산성'은 팽팽한 대립을 앞세워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고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통해 심적 긴장감과 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둘의 대립과 충돌은 신념의 대립이고 정체성의 대립일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이미 '서인'과 '남인'으로 나눠줬음에도 '병자호란'이라는 큰 시련 앞에 다시 한번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현시점, 현대사회에서도 고스란히 적용 된다는 점에서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이들 앞에 역사는 그저 과거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첫 장면에서 이미 영화는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예고하는 듯 보인다. 남한산성에 도달하기 위해 길을 안내 받은 예조판서는 노인에게 같이 갈 것을 제안하지만 노인은 어린 손녀를 얘기하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남겠노라고 한다. 이 짧은 장면에서도 두 캐릭터의 성격과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압축시키는 놀라운 장면이다. 한사람은 조정을 대표 하는 이이고 한사람은 하층민 즉, 백성을 대표하는 이이다. 계급적인 신분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까지 시나리오가 무척이나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다.
이 장면은 다시 한번 종반에 가면 이어지게 된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겪은 예조판서는 큰 깨달음을 얻게되고 노인의 손녀인 '나루'를 통해 자신이 칼을 들이밀었던 노인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신념이 정의롭고 옳다고 믿었던 자의 무력감과 허탈함은 그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 직접 겨누므로써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이조판서 역시 첫 장면과 종반부 장면이 똑같이 이어진다. 모든 것을 겪은 후 청의 황제인 '칸'앞에 당도 하였을 때 '삼전도의 굴욕'을 행하고 있는 인조의 등을 보며 회한의 눈물을 보인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역사적 결과 앞에서 스크린으로 직접 목도하고 있는 관객들 눈에는 '삼전도의 굴욕'이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어떠한 굴곡 속에서 시대의 흐름앞에 놓여진 두 신념이 보이고, 이 둘의 신념은 결과를 떠나 팽팽한 힘의 설전(說戰)이었다. 역사 앞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만약' 예조판서의 말대로 되었다해도 시대적 사건의 결과는 바뀌었을까. 혹여, 그 결과가 바뀌었어도 얼마나 어떻게 바뀌었을 것이며 이 국면은 어디로 흘러갔을 것인가.
여기에는 명확한 해답과 정답은 없다. '예조판서'와 '이조판서'의 대립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양반들이 벌이는 열띤 토론과 생산적인 소통의 장이었을 것이다. 누구하나 모욕과 굴욕을 주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며 예를 갖추는 설전은 그야말로 선인들의 선문답과 같았다. 그러나, 역사는 이 둘앞에 차갑고도 서늘할 수 밖에 없을 터, 결과적으로 누구의 행동이 옳았고 누구의 말이 옳았는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애초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한산성'의 절반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보는 재미이다. 예조판서 역을 맡은 '김윤석'과 이조판서 역을 맡은 '이병헌'은 두 맹수가 서로 충돌하는 듯한 인상을 심으며 영화의 지적 긴장감과 심리적인 긴장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더불어, 인조 역을 맡은 '박해일'이나 '박희순' '고수'도 이야기의 중요한 견인을 이끄는 역할로 큰 몫을 다하고 있다.
이야기가 영화의 핵심이긴 하지만 전투신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레버넌트'에서 생고생 하던 디카프리오가 생각나게 하는 연출과 카메라 앵글들은 서서히 줌 아웃을 통해 익스트림 롱숏을 함으로써 전장의 지옥도를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대극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와 '임권택' 감독이 떠오르는 것도 적잖게 보인다.
더욱 놀라운 점은 아마 황동혁 감독의 절제력일 것이다. 100억이 넘는 대작에 촬영환경도 범상치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감독으로서 충분히 대중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전작 '마이 파더', '도가니', '수상한 그녀'를 떠올리면 분명 뜨거워 질수 있는 소재임에도 온갖 절제력을 발휘해 이야기의 힘과 균형에 집중 시켰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거기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덤이다.)
사람들은 '역사적 과정과 결과가 이러한데 나(혹은 당신이)라면 어떤 판단을 했을 것인가?'라고 물어 볼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과 답이 결코 정답이지도 오답이지도 않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후대에 교훈과 반성을 발판 삼아 끊임없이 대화해야 하는 과정의 연속일 것이다. 이분법의 잣대를 버리고 생산적인 소통으로 반복해야 한다.
'남한산성'에서의 '나루'와 '날쇠'는 의미를 전달하고 이어주는 의미심장한 인물들이다. 벼슬아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날쇠'와 두 명의 할아버지를 손꼽아 기다렸던 '나루'는 이윽고 역사의 현장 앞에 산증인이 되었다. 단군의 반만년 신화부터 최순실 게이트까지 역사를 심판하고 목도한 자는 다름 아닌 백성(民)이었다. 어린 여자 손녀와 늙은 두 노인이 서로 대비되며 시작과 끝을 보여줬던 이야기는 대장장이가 달구고 때리는 이명소리가 페이드 아웃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역사의 소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그 무기가 언제 어디에서 겨누고 있을지 이명소리가 끝나면 페이드 인이 될 것이다.
★★★★
정보 : 네이버 영화
사진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