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 질 수 밖에 없는 소재로 뜨겁게 울린다.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분명 뜨거워 질 수 밖에 없는 소재이다. 1987년은 격동하는 시대 그 자체였고 민주주의 도약의 발판이 된 계기이기도 하다. 영화적으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많은 이들이 5.18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나 6월 항쟁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이는 찾기 힘들다. 역사적 사건 자체가 뜨거워 자칫 신파로 흘러가거나 어쭙잖은 시선으로 만들면 되려 역풍을 당하기 쉽다. 이 모든 리스크를 안고 장준환 감독은 6월 민주항쟁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다. 분명히 뜨겁지만 엔딩 타이틀과 크레딧이 나오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울려지는 것은 가짜가 아니다. 이 영화에는 진심이 묻어나있다.
이제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사건이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소재로 위험부담을 안고 작업할 수 밖에 없는 '1987'은 거대한 시대적 혼란과 격동을 그려냄과 동시에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세심하고도 섬세한 묘사가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신파적으로 보이겠다 싶은 장면마저도 적잖게 보인다. 한명의 죽음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여러명의 사람이 모이면서 끝나고, 한 짝의 신발을 잃고 벗겨졌던 상황은 다른 누군가가 새 짝을 맞추거나 같이 걸으며 진행된다.
'지구를 지켜라'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연출했던 장준환 감독은 전작들 모두 비관론적인 시선이 짙었지만 그 안의 온도는 조금씩 높았다. 장준환의 작품 세계는 '1987'을 포함 고작 3편 밖에 되지 않지만 그 열기는 이 작품에서 정점을 찍는다. 올해 나왔던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와 '1987'을 비교해 보아도 흥미로울 것 같다. '택시운전사'에는 없지만 '1987'에 있는 것이 있다. 가장 클라이맥스는 원래 2/3지점에 놓아두지만 '1987'은 가장 마지막에 놓아두고 끝낸다. 감정적 울림을 서로 다른 곳에 배치한 이 두 작품은 하나는 신파적으로 보이게 하고 하나는 생각을 곱씹게 만들며 그 자리에서 숙고하게 만든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와도 유사하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다 한사람 한사람의 상세한 사정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박처장과 연희의 아버지 사연이 스케치 되며 나오지만 플래시 백을 쓰거나 흔한 사연담을 만들지 않는다.)클라이맥스를 위한 클라이맥스를 사용하지 않으며 익명이 아닌 필명(必名)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건이 은폐되지 않고 거리를 나오게 되었다. 부분의 합이 전체의 합보다 강력했던 시대는 전체의 합이 부분의 합을 민주적으로 심판 내리게 된다.(심판 받아야 할 이들도 반드시 이름이 거론된다.)
이분법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대공수사처의 인물들은 시대를 타고난 '악'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장준환 감독은 이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단칼에 보내지 않을뿐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로 생각하고 있다. 전두환의 얼굴과 박처장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은 거대한 시대의 인물이 단순히 타고난 악이 아니라는 것을 연출로써 보여주고 있다. '월북'이냐 '애국'이냐 물을 때도 이 인물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애국이라 생각하는 자이다.
병용(유해진)이 물고문을 당한 뒤 박처장과 어떠한 이야기를 할 때 박처장은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비하인드를 읊는다. 여타 다른 영화들이었으면 그 인물이 왜 이러한 행동과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사연을 플래시 백의 형식으로 읊거나 내레이션을 깔 것이다. 그러나, 짧게 스케치되는 빛과 어둠의 그림자를 시각화 시키고 비명과 총성을 보이스오버 입히면서 이 인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사연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으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단 몇 분만에 보여주는 뛰어난 연출이다.(단, 장준환 감독은 이들에게 동정과 연민은 불어넣지 않는다. 시대에 의해 괴물이 되었다 하여도 그 상흔은 지울 수 없는 법이니까.)
'1987'은 '남영동 1985'와 '변호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악명높은 고문으로 유명한 남영동과 시대의 인물을 살피려는 두 영화가 오버랩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실제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은 '송우석' 변호사가 故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로 인해, 뜨겁게 함성을 지르는 시위 장면까지 나오니까.)
시나리오 자체가 좋은 면도 있지만 아무래도 '1987'은 장준환 감독의 연출력이 단연 눈에 돋보인다. 광각렌즈와 핸드헬드를 주로 사용해 격동의 시대를 사실감 넘치게도 차갑지만 섬세하게 그려낼때도 뜨겁게 울리기도 하는데 여러 시도와 고심이 절로 보이는 세심한 연출력들이다.
화려한 캐스팅들도 눈이 번쩍이지만 특별출연한 배우들 면면도 만만치 않다. 이 영화의 중심축인 김윤석은 끝까지 영화의 무게를 잡으며 견인하고 있고 하정우, 김태리, 유해진, 이희준, 박희순 등 각기 다른 인물을 시대 속에 고스란히 녹여내고 있다. 그 외 김의성, 오달수, 고창석, 강동원, 설경구, 여진구, 문성근, 우현 등등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데는 마냥 캐스팅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원래는 캐릭터들이 많으면 영화가 산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많은 배우들이 나오는 것은 이 영화의 직접적인 내용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자체도 마찬가지지만 '1987'에서의 6월 항쟁은 단 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이 한사람 한사람들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기에 그럴 것이다.(다른 신인배우나 조단역 배우를 쓸수 있음에도 인지도 높은 배우들을 섭외한 데에는 이런 형식적인 시도와 내용이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뜨겁다고 비판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1987'은 그 뜨거움이 원동력이 된 영화이다. 이 소재는 절대 차갑게 만들 수가 없다. 아마 이성적으로 만들 수 있는이는 없을 것이다. 뜨거운 울림을 안겨주고 그럼에도 이성적인 판단을 관객들에게 맡긴다.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어?' '가족들은 생각 안해?'라고 하는 연희의 말은 그 당시 일반 시민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연희가 삼촌과 한 남학생의 사건 사고를 보고 도저히 묵살할 수 없는 시대의 현장에 있을 때 남학생이 건네준 신을 신고 거리의 현장에 나오게 되는 것은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객석 관객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버스위에 올라간 연희가 바라본 것은 광장에 운집해 있는 100만명의 사람들이다. 이 광경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 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대한민국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목소리를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이 폭력적인 시대 앞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엔딩 크레딧이 나오게 되면 故 박종철, 이한열 열사와 그 당시 실제 현장이 영상으로 나오게 된다. 이 역사는 30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질문이다. 단, 1년전 최순실 게이트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현장 집회를 우리는 목도했고 참여하였다. '1987'은 이제 무엇을 상념하게 하는가, 뜨겁게 가슴을 움켜쥐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할 것이다.
★★★★
정보 : 네이버 영화
사진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