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를 머금은 분노의 나라, 서부극의 형식을 띄면서 이내 마음을 삭인다.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영국 감독 '마틴 맥도나'가 그린 '쓰리 빌보드'는 실로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영화일 것이다. 전작 '킬러들의 도시'와 '세븐 싸이코패스'가 조금씩은 다르긴 하지만 아이러니로 뒤덮여 있는 세상을 블랙 코미디적인 요소로 뛰어나게 묘사를 했었다. '킬러들의 도시' '세븐 싸이코패스' 두 작품 모두 '쓰리 빌보드'와 연관이 있지만 조금 더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작품은 '킬러들의 도시'일 것이다. 아마도, 마틴 맥도나가 생각하는 세계는 동화를 꿈꾸는 인간들이 이런 세상에서는 결코 동화를 꿈꿀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며 쓸쓸하게 지나간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럼에도 캐릭터들에게는 지극히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이는 여러가지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7개월 전 밀드레드의 딸이 어떤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면서 끔찍하게 시체가 불에 탄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해결에 아무런 진척이 없자 밀드레드는 오래전 1986년 이후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광고판에다 광고 문의를 하게 되고, 마을로 들어오게 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커다란 문구를 새겨 단번에 화제를 몰고온다. 부활절에 맞춰 광고판을 올린 밀드레드는 경찰서장인 '윌러비'가 알게되면서 마을은 알 수 없는 기운으로 감돌게 된다.
예전에 그 광고판이 '하기스'를 광고 했다는점 부터 의미심장하다. 영화 오프닝에서 밀드레드는 차를 몰고 가다 손톱을 깨물며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하기스'가 기저귀 제품의 회사라는 점을 알게되면 밀드레드에게는 자연스레 딸 '안젤라'가 떠올려 질 수 밖에 없다. 광고판 문의를 하다 창가에 벌레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곤 손으로 원래대로 뒤집어 주는데 이를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이상한 페이소스를 선사한다(창가 건너편에는 윌러비 서장이 있는 경찰서가 있다).
DNA가 일치하지 않아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윌러비 서장의 말에 밀드레드는 단호하게 말하며 '그럼, 이 마을 모든 남자의 피를 뽑으면 되잖아'라고 일갈한다. 민법에 저촉 되더라도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받아 범죄를 저지르는 놈의 DNA와 일일이 대조해 백프로 일치하면 바로 죽여버린다고 말하는 밀드레드의 말에는 마음 속 밑바닥에 이미 증오와 분노 복수에 가득차 있는 엄마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마을의 경찰까지도 차별과 폭력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다. 범죄자들을 잡기는 커녕 오히려 흑인들을 언제 때려잡을까 궁리하고 심지어 광고판 직원인 '레드 웰비'에게는 빨간 머리색과 이름 때문에 공산주의자 같다고 말하는 역설적이면서도 차별적인 경찰들 뿐이다. 그 중에서 '윌러비' 서장만이 유일하게 올바른데 그러한 차별과 폭력의 대표주자인 샘 락웰이 연기한 '딕슨'은 '윌러비' 서장을 존경하고 있다.
사실상 미주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여주는 작은 축소판일지 모른다. '흑인' '난쟁이' '인종차별주의자' '공권력에 저항하는 여성'등 온갖 폭력과 혐오 증오가 가득한 곳이며 언제 어떤 사건이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분노로 넘치는 곳이다. 심지어, '윌러비' 서장도 중반에 가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 큰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는 암으로 인해 자살하는 것도 있지만, 밀드레드와 안젤라에게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밀드레드는 치과에서 일어난 소동 때문에 윌러비 서장에게 취조를 당하게 된다. 한참 이야기 하던 도중 갑자기 피를 뿜으며 밀드레드의 얼굴에 튀게 되는데 이 장면은 복잡미묘하면서도 그 자체로 처연한 장면이다. 여기에서 밀드레드는 이상한 대사를 한다. 윌러비에게 'I Know. Baby'라고 하는데 윌러비와 밀드레드가 내연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초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Baby'는 누구를 뜻하고 어떤 의미일까. 밀드레드는 갑자기 뿜은 피를 보며 윌러비가 아닌 자연스레 안젤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 뿐만 아니라, '윌러비' 서장은 많은 부분에서 '안젤라'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직접적으로는 안젤라의 사건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경찰서장이라는 점일테고, 다른 하나는 두 사람 모두 원인을 알 수 없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점이다. 결국 본인 스스로 생을 마감한 윌러비는 아내와 밀드레드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나게 된다. 자신이 죽기 전에는 안젤라의 사건을 해결할 수 없을거라 생각한 윌러비는 거액의 돈으로 밀드레드의 광고비를 대신 내줌으로써 조금이나마 위안과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마마보이로 나오는 '딕슨' 역시 극의 재미와 아이러니를 불어넣는 인물이다. 온갖 행패와 폭력으로 차별을 해오던 딕슨은 윌러비의 선임자로 '흑인 서장'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 전 '레드'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한 것을 흑인 서장이 목도하게 되고 딕슨은 흑인이 서장일리 없다며 작은 실랑이를 하다 서장에게 경찰서에 당장 꺼지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해고당한 딕슨은 윌러비가 죽기전 '딕슨'에게도 편지를 남기게 되는데 딕슨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이야기 해준다(이는 아이러니 하게도 밀드레드가 분노를 경찰서에다 화염병을 던지며 터트리게 된다).
경찰서에서 그 편지를 읽던 딕슨은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는다. 딕슨은 병원에서 자기가 죽도록 팬 '레드'를 만나게 되고,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리는 딕슨 앞에 '레드'는 숨을 가쁘게 쉬며 어떻게 할지 몰라한다. 만약 이 상황이 반대의 경우였다면 '딕슨'은 그 자리에서 레드를 죽도록 팼을까. 분노를 삭이던 '레드'는 딕슨에게 오렌지 주스를 건네주며 딕슨의 말에 답한다. 빨대를 넣어주곤 딕슨 쪽으로 빨대를 돌려주는 그 작은 디테일한 장면은 잊을 수 없는 페이소스를 남긴다.
'쓰리 빌보드'는 이야기 자체로만 보아도 흥미로운 영화이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로 가득한 세상에 마틴 맥도나가 블랙 코미디로 코멘트 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이라는 그 자체의 나라에 대한 코멘트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것은 바로 '서부극'이라는 형식일 것이다(서부극 스타일의 음악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미주리'라는 공간적인 특성을 보아도 떠올려 지는데 '미주리'라는 주 자체가 인디언 부족인 미주리족에서 따왔다는 것, 그리고 인디언 언어인 '흙탕물'이라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 점이다(대체로 미국의 주 이름은 인디언과 연관이 있다). 덧붙여 이 영화가 차량의 이동방향이 '동'에서 '서'로가는지 '서'에서 '동'으로 가는지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안젤라'의 사건도 의미심장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극 종반에 '딕슨'은 유력한 용의자를 찾게 되지만 중요한 DNA와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백인 남성으로 여겨지는 유력한 용의자는 형체도 알고 누구의 짓인지도 알지만 아메리칸 대륙을 침범했던 미국의 역사에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이 저절로 떠올려 진다. 이 영화에선 그 책임을 마을 공권력의 대표인 '윌러비'서장과(조금이나마)'딕슨'이 하고 있다는 점은 큰 의미를 부여해 준다(딕슨은 잊어버린 경찰배지를 찾아 결국에는 자신의 손으로 책임을 진다).
밀드레드의 광고판 앞에 사슴이 등장한 점도 상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얼핏 겉으로만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듯한 '사슴'은 밀드레드가 직접적으로 '환생'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지만 인디언에게도 사슴은 큰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안젤라가 화형을 당하고 그 자리에 검은 재가 남아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고, 더불어 중요한 순간 광고를 내려야 할 처지에 놓여있을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멕시칸 소년이 광고비를 대신 지불해줬다는 점에서도 덧붙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영국인 감독인 '마틴 맥도나'가 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그의 전작들인 '킬러들의 도시'와 '세븐 싸이코패스'는 타란티노 감독과 코엔 형제 그리고 스콜세즈 또한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와 연출로 좋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온전히 '마틴 맥도나'의 영화로 보여진다. 시종 살아 숨쉬는 듯한 각본과 연출들은 영화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좀처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극 자체의 탄력이 팽팽해 끝날때 까지 지루함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영화일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은 받지 못해도 각본상은 이 영화에 돌아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앙상블 또한 실로 대단하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영화에서 대들보같은 존재로 탄탄하게 이 영화의 중심을 이끌어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고'에서 연기한 '마지'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우연히도 여우주연상을 이 2개의 작품으로 받았다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디 해럴슨과 샘 락웰 역시 맥도먼드와 앙상블을 이루며 대단한 에너지를 내거나 받아친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는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일 것이다. 그 외에 인상적으로 나온 캐릭터와 연기는 딕슨의 엄마라 할 수 있는 '샌디 마틴'이라는 배우일 것이다. 극에서 많이 나오진 않지만 짧고 강하게 임팩트를 선사하는 '샌디 마틴'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어도 될 연기를 선사한다.
영화의 종결은 밀드레드와 딕슨이 차를타며 유력한 용의자에게 가는 씬으로 끝나게 된다. 차안에서 밀드레드는 딕슨에게 한 짓을 이실직고 하게 되는데 그 말을 들은 딕슨은 '당신 아니면 누구겠어요'라고 받아친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한 행동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지도 모를 그 사내를 만나러 간다(이 또한 아이러니 하게도 이 유력 용의자는 밀드레드의 가게에 와서 윌러비 서장의 사망 때문에 한차례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다).
'미주리'에서 '아이다호'로 가게 되는 이동방향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증오를 머금고 분노로 가득했던 이 두 사람은 서부극의 형식을 띄며 이윽고 마음을 삭이게 되지만, 그 분노는 전부다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 놈 죽이는 거 괜찮겠어' 라고 물었던 밀드레드는 딕슨이 '사실 괜찮지 않다'라고 하며 밀드레드에게도 다시 물어본다. 밀드레드가 가서 결정해보자라는 말을 남기며 엔딩을 선사한 마틴 맥도나는 아직 이 분노가 완전히 끝나지 않음을 명시한다(전 남편의 어린 내연녀가 밀드레드에게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서로에게 연민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다시 크게 생각해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으로도 이어지게 만들었다(미국의 역사 그 자체도 되돌아 보게 한다). 그럼 이제 미국은, 아니 이 세상은 이제 분노하고 증오하며 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것인가. 아이러니 가득한 세상에서 한 번더 분노를, 증오를, 혐오를 그 마음을 삭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