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다루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진귀한 바느질.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일 것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가 제작진의 간섭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최대한의 연출력을 보여줬다. 두 번째 연출작인 '부기 나이트'는 그의 의미론적 데뷔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포르노 업계를 배경으로 그린 이 영화는 단순히 포르노 업계의 조명만 비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인물들과 업계 그리고 시대에 떠밀려가는 한 단면의 벽화를 놀랍도록 보여준 영화이다. 지난 20여 년 간 단 8편 밖에 만들지 않은 과작의 감독이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 보면 경탄을 머금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8번째 장편 영화 '팬텀 스레드'는 과연 어떤 영화일까.
외관 상 '팬텀 스레드'를 보면 영국의 유명한 디자이너가 한 여인을 만나 자신의 영원한 뮤즈로 삼게 되는 전형적이고 관성적인 영화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이야기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지극히 보편적이고 섬세한 멜로물이고 사랑영화이다. 이런 사랑영화가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바로 폴 토마스 앤더슨의 보이지 않는 연출력이 뛰어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전작인 '마스터'와 '펀치 드렁크 러브'를 적절하게 융합시킨 영화처럼도 보이지만 이 두 영화와도 분명한 차별점이 있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레이놀즈'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데 영화 시작과 함께 인서트 되는 그의 모습들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여타 다른 영화에서도 하루 일과의 시작을 인서트하는 장면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연출은 '레이놀즈'가 어떤 사람인지를 코멘트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강박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후에 '알마'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언급이 되기도 한다.
비키 크리엡스가 연기한 '알마'는 자신이 그렇게 이쁘지도 않고 가슴도 작으며 어깨는 넓고 엉덩이는 커서 몸매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지만 '레이놀즈'를 만나고 모델일을 시작하면서 그런 컴플렉스가 사라진다. 완벽주의적인 '레이놀즈'에 비해 '알마'는 그들이 볼 때 엉성해 보일지 모르지만 온전히 주체적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분명하다. 예로, 원단 이야기를 하며 '알마'는 천이 거칠다고 말하자 레이놀즈와 시릴은 고급스럽다고 단언한다. 잘 몰라서 그러니 취향이 나중에 바뀔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알마'는 자기 취향을 좋아한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이처럼 '레이놀즈'와 '알마'는 모든 면에서 대비되고 있다. 취향도 완전히 다르며 성격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많이나며 심지어는 디자이너와 피팅모델이라는 점까지 두 사람은 교집합이 거의 없다. 영화 초반부 알마가 누군가에게 이 러브스토리를 이야기 해줄때 '그는 나에게 삶을 줬지만, 나는 그에게 전부를 줬죠'라고 말한다. 영원히 교집합 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은 왜 그토록 서로가 필요한 것일까.
영화 초중반 흘러가게 되면 '레이놀즈'와 '알마'가 저녁식사 데이트하는 장면을 의미심장하게 스케치한다. '레이놀즈'가 '알마'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자신의 어머니를 이야기 할 때 안쪽 주머니를 가르키며 항상 여기에 있다라고 말한다. 후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말하는데 디자이너 일을 16살때 어머니로 부터 배웠다고 말하게 되고 자신이 처음으로 옷을 만들었을때가 어머니의 두 번째 결혼을 위해 하얀 드레스를 맞춰줄 때라고 언급을 한다.
안쪽 주머니에 자신의 비밀을 감춘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데 이는 공주 드레스를 맞출 때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된다. 겉으로는 굉장히 강한 사람인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마도 어렸을 적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나 상처 때문에 안으로는 연약하고 쉽게 부서지는(혹은 부서져있는)인물이었다. 영화 전체를 다 보고나면 이는 '레이놀즈'가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인정을 받기위한 여정처럼도 보인다. 그러한 그의 성격을 훤히 깨뚫어 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누나인 '시릴'이라는 여자일 것이다. 디자이너와 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이 가족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의미심장하게 보여주고 있다(실권을 '레이놀즈'가 가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시릴'이 가지고 있다).
'레이놀즈'와 '알마'가 어디에서 처음 만났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알마'가 들어오기전 자신의 피팅모델을 보내고 난 뒤 안식이 필요한 것 처럼 보였던 '레이놀즈'는 아마도 예전에 살았을 고향에 내려가게 되는데 바로 그 고향과도 같은 곳에서 만난 사람이 '알마'라는 여자인 것이다. '레이놀즈'가 '알마'에게 대하는 행동을 보면 훨씬 그 이전에도 '레이놀즈'는 '알마'와 같은 여성을 여러차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방적인 관계를 선사했던 '레이놀즈'가 '알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곤 상당히 불편해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를 떨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전에 보아왔던 여성과 다를 뿐 아니라 바로 엄마에 대한 기억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에 '알마'는 레이놀즈를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데 바로 드레스를 가져오는 장면이다. 이는 고객의 부탁으로 기자회견과 파티에 가게 된다. 자신이 만든 드레스가 그녀에게 잘 맞지 않은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그가 가기 싫어하는 결정적 이유는 그 기자회견 자체가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을 위한 파티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레 엄마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레이놀즈를 보게되면 뒤로돌아 보기를 거부한다). 갑자기 쓰러져 방에 올라갔던 그 여성손님은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자청해서 드레스를 벗겨온다. 벗겨온 드레스를 가지고 둘은 마침내 처음으로 프레임안에 키스를 하게된다.
중반까지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종속 되어진것 처럼 보인다. 사랑이라는 권력관계는 덜 사랑하는 사람이 패권을 지니고 있기 마련, 이 이상한 사랑게임을 그만두자던 '알마'는 이제 그녀만의 방법으로 '레이놀즈'에게 안식을 주려한다. 바로, '독버섯'을 통해 그에게 휴식을 주기 시작하는데 '알마'는 애초 '레이놀즈'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다. 애초, 불완전한 인간들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사랑하기 위한 방법은 남들이 보기에 도덕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도덕적 심판에 근거해 관람하기 시작한다면 도통 이해되지 않는 사랑영화로 밖에 볼 수 없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다른 쪽의 사랑도 보여주고 있으면서 이들 역시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다. 종반까지 '알마'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던 관객들은 이윽고 그 사람이 '의사'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공주의 드레스에 관해서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독버섯' 사건 때문에 '레이놀즈'는 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여러사람들이 드레스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알마'는 치마 속 안에 어떤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저주받지 않았다'라는 문구인데 굉장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구이다. 이 문구는 엄마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되새기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문구처럼도 보인다. 그런 문구를 유사 엄마처럼 보이는 '알마'가 직접 떼어냄으로써 그 저주를 풀어줌과 동시에 알마에게 종속 되어진다.
레이놀즈가 알마에게 종속 되어진다라는 점은 단순히 독버섯을 먹고 사랑을 깨우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독버섯으로 만든 요리를 먹을 때 '레이놀즈'는 독버섯임을 알고 스스로 먹는다. 내내 인정을 갈구하고 불안에 휩싸여 있던 레이놀즈가 끝내는 '알마'에게 종속 되어짐으로써 이 사랑은 결국 평화를 되찾는다(그 평화는 마음의 평화일 수도 있고, 엄마에게 사로잡혀 있던 레이놀즈의 평화 일수도 있을 것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처럼 섬세하고 뛰어난 연출력은 바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 속 줄다리기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놀랍다는 점이다. 그의 전작들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연출이기에 실로 경탄스럽다. 바로, 남녀간 마음의 줄다리기를 어느지점에 놓아주고 끌어당겨야 하는지, 심리적인 완급조절까지 풀어낸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연출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사랑이야기는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도 한 번 본적이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 또한 일반적인 사랑영화가 아니다. 갑자기 찾아온 이들의 사랑은 일반적이라고 일컫는 사람 외에도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불완전한 사람들 또한 사랑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보게되면 이 세상에는 정상적이라고 불릴만한 인간은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에게 세상과 인간은 언제나 불안하고 불완전 하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이라는 점도 분명하게 새겨지는 작품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찍기 전까지 자신이 은퇴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인터뷰 했었는데,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된지는 명확하게 밝히진 않았지만 아마도 이 작품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은퇴를 뿌리 박았다라고 이야기 하긴 했지만 세상사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를터, 그가 변심해서 다시 돌아 왔으면 하는 바람이 이 영화를 보고서 더 간절하게 든다. 비키 크리엡스와 래슬리 맨빌 또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단 한사람도 불같은 연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 정적이고 차분하며 차갑게 연기하는데 그러한 연기톤과 방법론들이 '팬텀 스레드'에서 얼마나 깊게 스며들고 있는지를 배우들 전부가 알고 있는 듯 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세계관은 세상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불완전한 관계를 차갑고도 깊게 그려냈었다. 온도차이는 있지만 '리노의 도박사'에서 '팬텀 스레드'까지 하나같이 연출력이 실로 대단했다. 형식적인 선택에서 주요 인물들의 설정까지 꼼꼼히 차곡차곡 집어넣는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가히 장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레이놀즈'와 '알마'를 바늘과 실같은 관계로 이어맺는 솜씨는 폴 토마스 앤더슨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영화에도 여러 종류의 사랑영화가 있다. 사랑영화 특성상 관성적인 설정과 상황이 들어갈 수 밖에 없음에도 이러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깊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가 만드는 사랑영화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영화일 것이다. 아카데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감독을 기다리는 많은 팬들이 있는 이상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는 사랑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팬텀 스레드' 역시 바로 그러한 영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