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자리에 마음을 담아 채우려는.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임수정, 윤찬영, 이상희, 오미연, 서신애 님이 출연하고
이동은 감독이 연출한 '당신의 부탁'을 보고 왔습니다.
큰 기대감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보았다가
생각보다 더 깊고 좋은 이야기로 풍요롭게 다가오네요.
이동은 감독의(촬영은 이 영화가 먼저 끝났지만)전 작품
'환절기'와도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인물들이 어떤 사건(혹은 사고)을 통해
마음의 변화가 생긴다는 점,
그 마음의 변화를 영화가 예민하고 섬세하게 쫒아간다는 점에서
상당부분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환절기'가 얼핏 동성애 영화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보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인물의 변화가 중요했던 영화였지요.
'당신의 부탁'역시 남편이 죽고 2년 후,
갑작스레 찾아오게 된 남편의 아들을 맡게 되면서
효진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쫒아갑니다.
효진은 종욱이 오기 전 생활형편이
그닥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요.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을 정리하고,
어딘지 모르게 내내 답답했던 마음이 효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불쑥 찾아오게 되는 '종욱'을
자신의 친구인 '미란'에게는 아닌척 하지만,
아무런 불만없이 보호자로 자청합니다.
무기력하고 답답하며 화가자주 났던 효진은
왜 '종욱'을 데리고 온 것일까요.
후반부에서 효진이 언급하기도 하지만
제가 볼땐 죽은 남편 때문인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남편이 죽은 후 죄책감이나 동정심 같은
단순한 감정으로 인해 데려 온 것은 아닙니다.)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던 '효진'은
불쑥불쑥 그가 생각나면 항상 미안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지요.
종욱을 본 순간 '효진'에게는 남편이 저절로 생각날 수 밖에 없습니다.
흥미로운 관계와 설정도 눈에 돋보이는데,
여기에는 수많은 엄마와 존재하지 않는 아빠의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효진'을 비롯해, 효진의 친구 '미란', 효진의 엄마,
종욱의 여자친구 '주미', '주미'의 입양모로 나오는 '이모'
그리고 죽은 남편의 두 번째 부인으로 보이는 '연화'까지
총 6명이 나오게 됩니다.
이 6명의 엄마는 한 명의 엄마를 제외하고,
모두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할
'아빠'의 부재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그건 '종욱'역시 마찬가지이지요.
'미란'의 남편은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효진의 엄마로 나오는 '명자'와 종욱의 여자친구 '주미'는
사실상 같은 조건이지만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효진'이 '종욱'과 그네에서 하는 대화를 통해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하나는 포기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지요.)
'연화'는(신내림 때문에)살기 위해 어쩔수 없이 역할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럼, 한 명의 엄마가 남게 됩니다.
그건 '주미'의 입양모로 나오는 '서영'이라는 인물입니다.
유일하게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나옵니다.
'종욱'은 원래 자신이 키우려고 했으나,
어린 나이와 책임지기 힘든 현실적인 조건들 때문에 입장을 바꾸게 되지요.
종욱은 '주미'의 아이를 보러 갈때
입양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멀뚱멀뚱 바라보던 종욱은 그 부부에게 인사를 합니다.
이 부분은 여러가지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주미'의 아이는 곧 '종욱' 자신의 처지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인사하는 방향이나 의미로 보았을 때 인사는 남자에게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장면은 사실 저에게 감동적이고 뭉클하게까지 다가옵니다.)
5명의 엄마는 모두 부재중인 아빠가 있는 반면,
유일하게 아빠라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
'종욱'은 진심어린 인사를 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창작자의 마음과도 연결된다고 봅니다.)
이 6명의 엄마들은 제각각 설정과 관계가
복잡하고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효진'은 원래 임신해서 아이를 가졌었는데
자연유산되어 아이를 잃었고,
'주미'는 자신의 말대로 동정 마리아처럼
자연임신해서 자연분만 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연결이 됩니다.
(이 중심에는 '종욱'의 자리가 존재한다는 점이 더 크고요.)
또 하나는 경수의 두 번째 부인인 '연화' 또한 감동적으로 묘사됩니다.
'종욱'은 자신의 친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릴적 보살펴 주고 키워준(두 번째)엄마의 기억 때문에,
여기저기 수소문을 통해 찾아가게 됩니다.
종욱이 연화를 찾은 것은 부재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지요.
물리적인 거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효진'과 '종욱'이 같이 동행한 것도 의미심장하게 보입니다.
그 날 밤 종욱은 효진에게 '연화'를 보고 불쌍해보였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엔딩에서 플래시 백으로 나온 '연화'와 '종욱'은
서로 간에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밖으로 진실을 표출하지 않고 포옹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보이는 이 엔딩장면은
그 자체로도 뭉클하고 감동적이지만
그 속내까지 들여다 보면 더욱 진하게 남게 되지요.
'효진'과 효진의 엄마 '명자'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이 관계는 김혜자님과 최진실님이 출연했던
'마요네즈'가 떠올려지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마요네즈'의 모녀 관계가
2018년 버전으로 나온 것 같은 생각까지 들게 하는군요 ^^
(집 구조까지 비슷해 더욱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효진과 썸 관계로 나왔던 '정우'는 결국 연인관계로 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지만,
효진이 힘들때 상담을 해줬던 예비 심리 상담사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네요.
이 관계는 후에 종욱이 들어옴으로써,
효진과 종욱의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변주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부재의 자리에서 시작해
부재의 자리를 채우며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효진'과 '종욱'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진심을 다해 채우려는데서
신뢰감과 감동을 선사하게 되지요.
영제가 'Mothers'라는 것과
'당신의 부탁'이라는 제목 또한
저에겐 상당히 잘 지은 제목으로 보여집니다.
'당신의 부탁'은 죽은 남편의 부탁일 수도,
효진이 종욱에게 하는 부탁일 수도,
종욱이 효진에게 하는 부탁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마음 깊숙이 들어오게 됩니다.
(종욱은 일전에 효진에게 '당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영화가 가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깊숙이 들여다 사람과 사람 간의 자리를
진심으로 채워주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전작 '환절기'보다 더 깊은 이야기로 풍요롭게 해줍니다.
임수정 님을 비롯해 윤찬영 이상희 오미연 김선영 등
극과 인물에 맞게 인상적으로 연기를 해줍니다.
이상희씨는 전체적인 리듬과 유머를 담당해
무겁고 진지해질수 있는 분위기를
가볍게 긴장을 풀어주면서
자신의 역할을 성심성의껏 해주고 있습니다.
윤찬영은 이 영화로 연기를 처음보게 되었는데
사춘기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알 수 없는 검은 웅덩이가 있는 것처럼,
적지않은 곳에서 눈에 띄는 연기를 성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임수정 씨는 활활 타오르거나
기술적으로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느리고 잔잔한 분위기에서 인물의 내면을
차분하고 묵직하게 그려낸다는 면에서
저에겐 훌륭한 연기로 보여집니다.
(개인적으로 임수정씨 베스트 연기는 '싸이보그~'라고 생각합니다.
'싸이보그~' 다음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준 것 같네요.)
이동은 감독의 전작인 '환절기'는
이야기에 비해 깊게 다루지는 못해,
이 작품 역시 '환절기'처럼 나오겠거니
생각한 저를 크게 당황시켜주시네요.
(죄송합니다 감독님 ㅠ)
설정과 관계가 다소 복잡하긴 하나,
촘촘하고 섬세하게 다루어 이야기를 끝까지 곱씹게하고
가족의 의미 외에도 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야기를 풀어내어 '환절기'보다 훨씬 더 좋게 다가오네요.
이런 섬세하고 진심어린 작품을
다음영화에서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