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정서가 담긴 그 모든 것들.
(스포성 글이 있습니다.)
권해효, 김민희, 김새벽, 조윤희 님이 출연하고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그 후'를 보고 왔습니다.
홍상수 작품의 세계는 언제나 흥미로웠죠.
'오 수정', '북촌방향'에 이어 세 번째 흑백영화이기도 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은 초기작들에 비해
점점 '시간'이라는 테마가 굉장히 중요해 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과 공간 모두
홍상수 영화에서는 중요했지요.)
시간을 비틀거나 시간을 교란하거나
아니면 시간을 다시 리플레이하거나
여러 번 반복하면서 그 미묘한 차이를 짚어내었던
홍상수의 연출은 신비롭기까지 했었죠.
이번 작품 '그 후'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형상화해서
과거와 현재(혹은 미래)를 서로 충돌시키거나
합쳐놓아 그 사이에 나오는 인간의 정서나 상황의
접점들을 살펴보는 듯합니다.
(저에겐 '아름'과 '창숙'이
마치 시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프닝에 '봉완'이 거실에 나오고
크레디트가 지나면 프레임 중간에
시계가 덩그러니 나옵니다.
(홍상수 영화에서
왕가위 작품이 생각날 때도 있네요 ^^)
이후에도 시계는 한번 더 나오는데
'아름'과 어떤 사건을 겪고 나서 술 먹는 장면에서 더 나옵니다.
무척 흥미로운 점은
'새벽'과 '저녁'이라는 차이입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첫 오프닝에서 나왔던 시간은 새벽 '4시 30분'경이고,
'아름'과 술을 마시기 시작할 때는 저녁 '7시 40분'경이라는 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떤 특정 공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밤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의미심장하지요.
어두컴컴한 밤이 거의 끝나가지만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시점과,
이제 막 해가 지고 밤이 드리우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은 두 상황에 놓여 있는
'봉완'의 심정을 서로 비교시켜 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흑백을 사용한 점이라던가
과거와 현재를 서로 뒤섞어 놓는다던가 하는 연출은
그 자체로 신비스럽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합니다.
'창숙'이라는 인물도 흥미롭지만,
'아름'의 존재는 이 영화의 중심점 같습니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이면서 유일하게
이 작품 전체에 냉정하고도 어떤 기둥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이러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는
종교 신앙 자라는데서 더 기이하게 다가오는 측면도 있습니다.
'아름'을 제외하고
각 인물들은 '보이는 것만' 믿게 되지요.
단적인 예로, '봉완'의 아내가 가져온
바람을 핀 결정적(?)증거라 할 수 있는 연서를 보고
상당한 오해를 하게 되고,
'봉완' 자체도 '아름'과 식당에서 나눈 대화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냐고 되풀어 반문합니다.
그 결과, '보이지 않았던 존재'인 '창숙'이 오게 되면서
둘의 사랑은 지속될 거라 믿었지만 추후에 끝까지 이어지진 않았지요.
'아름'이 일을 단 하루만 한 것도 저에겐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아름'의 극 역할은 이 작품에서 조금은 동떨어져 보이고
불필요해 보이는데도 임팩트 있게 남아있는 것은
그 사건 자체의 임팩트도 컸지만,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의 자장(磁場)도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전체가 대부분 저녁이었는데
유일하게 엔딩으로 가면 아침입니다.
그 아침도 '봉완'이 직접 배웅을 해주며
자신이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는 책을 주며 끝나게 되지요.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그 책이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우리나라 제목은 '그 후'라고 합니다.)
일전에 많은 책을 가져갔었던 '아름'은
'봉완'에게 '그 후'를 선물 받게 되죠.
이 영화의 제목이자 그 소설은
단 하루였지만, 일전에 있었던 일들을
직접 보고 듣고 겪고 충돌하며 지난
'아름'에게 주는 작은 감사의 표시일지도 모릅니다.
홍상수 영화는 언제나 그렇듯
아침 쪽대본에 우연적 상황을 영화에
그대로 담게 되는데 눈이 오는 장면들 또한
미리 계획하고 한 것이 아닌 하루 전에 알았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신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그 하루 전에도 눈이 온다고 예보는 되어있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홍상수의 감은 상당히 남다릅니다.
인터뷰를 보면 오히려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네요. ^^)
거기에다 극 중 권해효 님의 아내로 나오는
조윤희 님이 실제 아내라는 점에서도 무척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연극배우 출신이라고 하시는데
실제 부부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첫 장면에 나오는
'봉완'과 아내의 대화 장면은 실제 부부이기에
그러한 감정과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서 느껴지는 공기 등
섬세한 지점을 더 밀도 있게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새벽도 인상적이고
김민희도 역할만큼이나 존재 자체도
이 영화의 중심으로 보입니다.
(홍상수의 영원한 뮤즈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겠지만 지금까지 본다면
김민희는 홍상수 영화에 너무나 잘 맞아떨어집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 후'는
최고작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워낙, 훌륭한 전작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그 날들이 그 후가 되고
그 후의 그 날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담겨있는 날일 테지요.
이 무시무시한 창작력으로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그의 작품들은 '클레어의 카메라'를 기다리게 하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