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다 쓰고 싶다
나는 글 잘 쓰는 사람을 질투한다.
자기 생각도 뚜렷하고 매력 있고 어리고 게다가 글까지 잘 쓰는 작가라면 아주 샘이 나 죽겠다.
내 젊은 날 뿌연 머릿속은 온통 술 먹고 놀고 싶다는 생각(그렇다고 마음껏 놀지도 못했다)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난 뭣도 없으면서 허세도 있었던 것 같다. ‘난 다른 여자애 들이랑은 좀 달라’하며 아는 척, 아닌 척 하며 내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 채 허송세월 보냈다.
반면 요즘 젊은 작가들은 어쩌면 그렇게 똑똑하고 제대로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알며 갓생을 사는지 참말로 멋있고 부럽고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진다.(멋있으면 다 언니)
글쓰기를 원래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잘 한다는 말도 자주 못 들어 본 것 같다.
글쓰기보다는 그림이 좋았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묘사보다는 불분명하고 두리뭉실한 표현이 편했다. 어쩌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내 영역이라고 절대 생각도 못했던 것 일지도.
어쨌든 글쓰기도 그림도 한 평생 다 갖다 바치는 지독한 짝사랑 중이다.
그러다가 세상에 의해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확신이 들던 어느 날 갑자기 책에 빠지게 되었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책과 세계, 강유원)
이 문장을 온 몸으로 증명하듯 내상입은 동물처럼 시름시름, 웅크려서 혼자 책으로 벽을 쌓고 그 속으로 도피하곤 했다. 그러다가 침전되었던 나의 말들이 마음속에 먼지처럼 굴러다니다가 안고 있기 힘들만큼 뭉쳐지면 토해내듯 쓰곤 했다. 그렇게 쓰기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던 현실에, 수면위로 잠깐 올라와 숨쉬듯 토막 글을 쓰고 다시 잠수했다.
감정의 배설이었고 간절한 계획표였고 아무 의미 없는 하루의 지루한 일기였다. 쓰면서 덧없이 혼자 줄줄 울기도 했고 내가 쓰고도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당황한 채 그만둔 적도 많다.
그런데 언제나 쓰고 나면 마음이 편해졌다. 오랜 평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생각이 글자로 뭉쳐져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문단이 되고 하나의 어떤 실체가 되는 편안함.
결론적으로 그 누가 알아주지 못한 다해도 분명 나에게는 뿌듯하고 조금 즐거운 일이었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누군가에게 모조리 털어 놓고 싶기도 하고 누가 볼 까봐 무섭기도 하다. 여기에도 아이러니가 있다.
글쓰기는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모호하다.
청소 따위의 일들은 일단 내가 할 것들이 눈에 보이고, 밤에 했다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 설거지가 마음에 안 들었던 적이 없다.(밤에 감성에 절어 써 내려간 글을 아침에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비공개로 돌린 경험이 꽤나 있다) 집안일은 어느정도 시간을 들이고 나면 언제나 비슷한 결과, 대체로 만족할 만한 그 것으로 도달한다. 보기 싫고 지저분한 것들은 싹 치워지고 깨끗하고 깔끔함이 남는다. 내가 집안일을 (가끔!) 열심히 하는 이유다. 나라는 사람이 그래도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언제나 비슷한 결과값을 주는, 그러나 타임루프에 빠진 듯, 매일 똑같은 맵에서 다시 게임을 시작해야하는, 나는 원하지 않는 반복되는 게임.
하루하루 생각없이 지내다가 문득 최면에서 깨어난 듯 각성 되는 순간이 있다.
‘이래도 되나? 이게 맞나? 나 잘 하고 있는 건가?’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은 자주 들지만, 쓰고 싶은 마음은 가끔 생긴다.
계속 추가되는 나의 ‘오늘의 할 일’ 목록 맨 밑에는 항상 ‘뭐라도 쓰기’가 자리잡고 있지만, 그 ‘할 일’까지 도달 한 적은 많지 않다. 바쁜 날은 할 일이 많아서 못 쓰고 안 바쁜 날은 무기력해서 안 쓴다.
몇 시간을 끙끙대며 써 내려 가도 A4 1장 채우기가 힘들고, 물 흐르듯 써 내려갔다 싶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면 정말 물처럼 밍밍거나 흐름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정신이 없다.
한 가지 핑계를 댄다면 아이를 둔 작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작가일 것이다. 엄마란 존재는 (“엄마!”) 뭔가 진득하게 앉아서 무언가를 한다는 자체가 힘들고(“엄마 어딨어?”) 계속 쌓이는 집안 일을 끊임없이 쳐내야 하고(“엄마 뭐해?”) 나 만을 필요로 하는 사랑스러운 작은 존재로부터 계속해서 부름을 받고(“엄마 일루와봐”) 일 단위로 수행해야하는 것들이 무수히 이어지기 때문에 자꾸만 흐름이 끊긴다. (“엄마?”) 그렇기 때문에 방금 내게 날아들어온 영감이나 생각을 파고들어 깊고 깊게 이어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다. 내 글의 맨 첫번째 팬이 되고 싶다. 정돈된 내 글 앞에서 이게 내 생각이라고, 난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는 쓰는 마음을 생각하는 작가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다.
이런 멋진 글쓴이들도 쓰기에 대한 고민이 있을까 싶다 가도 얼마나 깊고 넒은 쓰기의 고통이 있었을까 싶다. 어쩌면 더 격렬히 쓰기 싫고 어려울수록 좋은 글이 나오는 지도 모르겠다.
가장 진솔하고 고독하고 즐거운 행위, 쓰기.
9명의 작가들 각자 나이도 환경도 직업도 생각도 다르지만 쓰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딘가 비슷한 면이 있다. 모두가 백지를 앞에 두고 어떤 마음이었을 지, 지금 내가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공감하고 때론 슬며시 웃으며 읽었다.
나도 휘갈긴 날것의 감정이 아닌, 마음속 떠다니는 생각들을 거르고 걸러 가장 진솔하고 깨끗한 마음만을 적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