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2018년도 쉼 없이 달려온 독서모임 회원들. 최근에 묵직하고 굵직한 책을 많이 다룬 것 같아 회원들과 스스로에게 연말에 휴식 같은 책을 하나 선물하고 싶었다. 영화는 오늘날 가장 보편화된 취미이고 누구나 단시간에 보고 나올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책 보다 더 진입장벽이 낮은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연애시절 가장 만만한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고, 누구나 휴일엔 이불과 한 몸이 되어 영화 몇 편씩 정복해나가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을 꾸리고 특히나 육아를 하는 엄마들이 된 지금 영화 한 편 보는 게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책은 틈틈이 읽을 수 있지만, 영화는 한 호흡에 소화해야 하는 특징이 있어 두 시간을 통째로 비워 내야 하는 것이 결코 엄마들에게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영화만이 주는 여유 같은 것이 있다. 오롯이 영화와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 잠시 현실세계를 암전하고 영화 속의 감정을 느끼고 잠시 살다 나올 수 있다. 영화도 상업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분명 사유할만한 문제를 던져주고 함께 이야기해봄직한 이슈들도 많은 것 같아 회원들과 함께 보고 느끼고 토론해보고 싶었다.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는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영화 관람 날짜 기준으로 열두 달 목차로 재편한 책으로 1월부터 12월까지의 영화를 한편씩 선정하여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상위권 4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캐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후, 우리 모두는 캐롤과 사랑에 빠졌다. 딸은 물론 자신의 정체성까지 피하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당당한 캐롤. 그리고 아직은 뭔가를 결정 내리기엔 미성숙하지만 강단 있고 개성 있는 테레즈. 두 캐릭터를 보며 ‘아, 나도 저랬는데...’ 또는, ‘나도 나이 들면 저럴 수 있을까?’등 생각의 퍼즐들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자신을 투영해보았다. 두 여인의 사랑이야기라기보다 그냥 두 사람의 삶의 여정과 사랑이야기였으리라. 그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과 끝이 남녀의 그것과 전혀 다름이 없었고 그것을 지켜봤던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하필 ‘그녀’였냐고 의문의 생기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나 설명 필요 없이 그냥 ‘그녀’였으니까. 영화는 불꽃이 튀는 순간이나 이별 뒤 오는 애절한 그리움 모두 훌륭하고 아름다운 비주얼로 완성해주었다. 연말연시 분위기 물씬 풍겨주며 마지막엔 희망적인 결말까지 맺어주어 좋았다.
‘4등’ 최근 유행하는 드라마 ‘스카이 캐슬’과 겹치며 엄마들 사이에선 언제나 이슈인 (사)교육 열풍... 엄마 된 입장으로 이 영화를 보자니 정말 웃기고, 슬프고, 아프고, 씁쓸하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그렇다. 엄마는 진짜 옆집 엄마 같고, 아이는 진짜 내 아이 친구 같고, 아빠는 진짜 우리 집 애 아빠 같다. 아마 선생님도... 그럴 수도.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10여 년을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대한민국 현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나. 우린 또 답이 없는 문제만 곱씹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폭력은 폭력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2018년 4월에 독서모임에서 다루었던 ‘이상한 정상가족’에서도 나왔듯이. 그 어떤 것으로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단기간의 성취를 위해서 폭력적인 가르침밖에 받지 못했던 코치 광수의 불우한 유년이 가장 안타깝다. 과거를 회상하며 선생님들이 나를 더 때렸어야 한다며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반성하지도 않고 변할 의지조차 없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뒤쳐지는 것을 맞는 것보다 무서워하는 엄마를 보며 공감이 조금 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미래의 내가, 미래의 나의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또 속절없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인사이드 아웃’
아이와 함께 보다가 엄마가 눈물짓는 애니메이션. 그 의미와 개념이 추상적인 것이 많아 가볍게 생각했다가는 놓치는 것이 많을 수 있기에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봐야 하는 영화이다.
기쁨을 위해선 슬픔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실로 고차원적인 결말까지... 이와 관련하여 많은 한 줄 평을 남긴 회원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분명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남기는 영화이다. 유머 측면에서도 꿈 공장이라든가, 자꾸만 흥얼거리게 하는 CF 속 의미 없는 노래라든가, 어른도 깔깔 웃게 만드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영화다. 라일리의 감정 본부 멤버는 남녀가 섞여 있고 개성이 뚜렷한 반면에 어른들의 감정 통제본부는 모두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주 감정도 정해져 있고, 성적 영역을 포함해 정체성이 거의 완성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되었다. 영화 속 환경적 변화와 성장을 겪고 있는 라일리처럼, 우리도 감정이 무너지는 순간, 그리고 내가 통제가 되지 않는 순간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이른바 나의 ‘행복’을 위해 내 머릿속 감정 통제본부에서 이토록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귀엽고 따뜻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마션’
우주영화라기보다 우주가 배경인 한 긍정적인 인간의 생존기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우주를 사랑하는(?) 회원들에게는 너무 쉽고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함께 보았던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와 비교하면 머리 아픈 상대성 이론이나 물리학 지식이 없어도 전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그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우주적인 것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놀라운 면을 볼 수 있었다. 국가에 대한 두터운 신뢰, 자국민에 대한 당연한 책임 그리고 진취적이고 낙천적인 사고가 어떻게 보면 덜 현실적이고 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행복한 광경들이란... 대한민국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겐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든 장면이었으니 더욱 SF적인 느낌이 있었겠다.
한 줄 평
SY :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가 아깝지 않은 사고력 짙고 아름다운 문장들.
JE : 영화를 통해 사고해 볼 만한 사안들을 사려 깊은 문장들로 생각하게 해 주었다.
LJY :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 완성된다는 걸 깨달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에 위안받았다(영화 인사이드 아웃)
BR : 슬픔이 가지고 있는 정화능력!! 내 삶에서 슬픔을 맞이할 태도를 바꿔준 계기(영화 인사이드 아웃)
PJY : 회상하기 시작할 때 유년은 끝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어렴풋한 아름다움, 나를 위로해준 김혜리 작가의 글(영화 인사이드 아웃)
MJ : 좋은 영화를 찾아본다는 것이 내 삶에 있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지 알게 되었다.
HH : 4등이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현실에서 살고 싶다.(아프게 감상한 영화 4등)
EH : 그녀의 시선을 바라보다가 어느덧 영화 속에서 유영하는 나를 보게 된다. 1월 소풍에 나눈 우리들의 영화 이야기가 더욱 행복을 더한다.
EY : 봤던 영화 또 보게 하고 안 본 영화 찾아보게하는 영화 속 우리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