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빛났던 지성은 왜 사라졌는가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시절, 집현전은 조선의 심장과도 같은 기관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농사직설 편찬, 과학 기술 발전, 악보 제작, 의학 연구…
이 모든 정책과 발명 뒤에는 집현전이라는 지적 공동체가 있었다.
하지만 세종이 떠난 이후,
그 찬란한 집현전은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조선의 가장 창의적이고 열린 연구기관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오늘은 그 위대한 기관이 어떤 흐름을 거쳐
쇠퇴하고 해체되었는지를 조심스럽게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여정을 통해, 우리는 ‘지식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종 사후, 왕위는 맏아들 문종에게로 넘어간다.
문종은 병약했지만 학문을 존중했고, 집현전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통치 기간이 짧아(재위 2년), 정책적 계승보다는 형식적 존속에 가까웠다.
문종의 아들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정치적 혼란기로 접어든다.
어린 단종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고,
그 틈을 타서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권력을 장악해나간다.
집현전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면서 ‘학문의 자율성’ 역시 위협받기 시작했다.
1455년,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로 즉위한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왕위 찬탈이 아니었다.
조선의 ‘정통성’과 ‘학문 중심 정치’라는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변화였다.
세조는 실용적이고 군사 중심의 정책을 중시한 왕이었다.
자신의 왕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세종 시대의 가치와 유산을 의도적으로 정리하거나 축소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집현전은 문제였다.
그곳은 훈민정음을 만든 중심이자,
단종의 정통성을 지지했던 인물들이 포진해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는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사육신 사건)을 이유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주요 집현전 학자들을 처형하고,
이듬해인 1457년 집현전을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집현전이 사라진 이후에도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관은 존재했다.
홍문관, 예문관, 승문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경전 해석, 문서 작성, 왕의 언론 기능 보좌에 머물렀고,
실질적인 정책 실험과 창의적 연구는 줄어들게 된다.
결국 세종 시기의 ‘학문이 정책을 이끈다’는 철학은
‘왕이 결정하고, 신하가 집행한다’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지식과 정치는 다시 분리되었고,
정책은 점점 더 보수적이고 형식적인 행정 절차로 굳어지게 된다.
집현전의 해체를 단순히 세조의 권력욕 때문이라고만 보긴 어렵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한계도 있었다.
정치 권력에 의존적이었다: 집현전은 왕의 뜻 아래 움직이는 기관이었다.
세종처럼 지식과 사람을 신뢰하는 군주 아래서는 꽃을 피웠지만,
권위 중심의 왕 아래에서는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정치 참여의 이중성: 집현전 학자들은 단순 학자가 아니었다.
왕의 정책을 연구하고, 때로는 정치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들이 ‘학문’과 ‘권력’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 순간, 학문의 생명력도 위험해졌다.
후속 인재 양성 체계의 부재: 세종은 집현전을 만들었지만,
그 철학과 운영 방식을 제도화하거나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는 부족했다.
결국 왕이 바뀌자 조직도, 인재도, 철학도 함께 사라지게 된 것이다.
집현전의 해체는 단지 하나의 기관이 사라진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학문과 정치가 결합해 정책을 만들 수 있었던 가능성의 붕괴였다.
그리고 동시에, 지식 공동체가 권력에 의해 얼마나 쉽게 해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정책을 만든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식이 실험되지 못하고, 권력의 편의에 따라 흔들린다면
그 시대는 성장해도 깊어질 수 없다.
세종이 만들고, 세조가 지운 집현전.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사라진 이상을 다시 배우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집현전의 부활을 꿈꾸며 만들어진 현대의 정책 싱크탱크들,
그리고 세종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오늘날의 시도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잊힌 이상은 때때로, 다른 시대에 되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