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스쳐간 인연의 진정한 의미
시절인연은 떠나도, 그때 웃던 내가 남는다.
살아보니, 이 말이 이렇게 마음 깊숙이 스며들 줄은 몰랐습니다.
젊은 날에는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누구는 오래 곁에 남고, 누구는 어느 날 불쑥 멀어지지요.
처음엔 헤어진 이유가 마음에 걸립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왜 그렇게 됐나, 누구 탓인가 곱씹고 또 곱씹습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기도 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 나이쯤 되고 보니,
그 질문들엔 더 이상 답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인연이라는 건 원래 머물기보단 지나가는 게 더 많았고,
그래서 그 짧은 머뭄이 더 깊이 남은 것이더군요.
기억이란 게 참 신기합니다.
얼굴은 가물가물하고, 이름도 어느샌가 잊히는데,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순간의 공기나 감정은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가을 햇살이 내리던 오후, 나란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말없이 창밖을 보던 그 시간.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함께 쓰며 천천히 걷던 그 골목.
아무런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했던, 그 묘한 침묵의 무게까지.
정작 그 사람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아도, 그때 내 마음은 아직도 거기 남아 있습니다.
그 인연을 그리워하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사실은 그때의 '내 모습'이 그리운 것이더군요.
누군가를 향해 전심을 다해 마음을 주고, 서툴지만 진심으로 웃고, 소박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설레던 그 시절의 내가.
그래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사람보다는 그 시절입니다.
그때의 햇살, 바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내던 한 사람의 청춘.
사람은 떠나도, 그때의 감정은 남습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아쉬움이든 원망이든.
모든 감정은 결국 그 시절의 내가 느낀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시절인연을 '흘려보내야 할 것'이 아니라,
'가끔 꺼내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말이지요.
찍을 땐 몰랐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한 장의 사진 속에 참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요.
누구에게나 시절인연은 있습니다.
때로는 짧은 동행이었고, 때로는 마음을 깊이 흔들고 지나간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 인연이 내게 무엇을 남겼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떠났지만, 그때 웃던 내가 내 안에 남아 있어요.”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시간이 흘러 나이 들어도, 내 안 어딘가에 여전히 웃고 있는 내가 있다는 건 말입니다.
지금의 나는, 그 수많은 시절인연들이 다녀간 뒤에 남은 껍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인연들 덕분에 더 부드러워지고, 더 단단해지고, 더 따뜻해진 사람입니다.
그 시절을 함께 해준 이들에게, 비록 지금은 서로의 안부조차 모른다 해도,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 청춘은 외롭지 않았고, 그들이 떠났기에 나는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불현듯,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조용히 되뇌어봅니다. "그래, 참 잘 웃던 시절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 인연이 남겨준 선물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웃고, 울고, 설레던 '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니까요.
시절인연은 지나갑니다.
그러나 지나간다고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한 번쯤은 다시 꺼내어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이야말로 인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요.
언젠가 다시 그 시절을 돌아볼 때, 부디 나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웃고 있었기를.
그것이면 됐습니다.
-2025년 06월 01일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