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조 제안이 팀장의 논리(예산, 관습 등)에 막힌 이후, 나의 자존감은 급격히 소멸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설비를 혁신적으로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팀장이 지시한 대로 최소한의 변경만 적용한 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운용되게끔 유지하는 일이 었다.
나의 '넘치는 열정'과 '문제 해결 능력'은 이 회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쓸모없는 훈장처럼 박제되었다.
이 지독한 무력감을 심화시킨 것은 바로 정 부장이었다.
그는 우리 팀 팀장은 아니었지만, 우리 팀의 모든 비합리적인 관습의 근원이나 다름없었다.
정 부장은 나의 업무 효율성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보여주기식 성실함'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의 비합리성은 사소한 지시에서 시작되었다.
하루는 퇴근 후, 정 부장이 밤 9시에 카톡을 보냈다.
"현우 씨,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초기 검토 자료. 내일 아침까지 출력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두세요."
나는 이미 퇴근했고, 해당 자료는 클라우드 폴더에 공유된 상태였다.
굳이 종이로 뽑아 책상 위에 놓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분노했지만, 다음 날 아침 7시에 조기 출근해 수십 장의 자료를 인쇄하여 그의 책상에 올렸다.
그날 아침. 담배를 피우러 건물 뒤편으로 나섰을 때, 정 부장과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았다.
"부장님, 죄송하지만, 어제 자료를 클라우드에서 바로 확인하실 수 있는데, 굳이 종이로 출력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혹시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 해서요."
순전히 업무적인 이유인 척 질문했다.
정 부장은 왼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여유롭게 한 모금 마시며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존대와 반말을 섞어가며 무시하듯이 대답했다.
"현우 씨, 나는 종이로 봐야 마음이 놓여요. 그리고 업무 자료는 인쇄해서 각자의 자리에 딱 놓여 있어야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인쇄한다고 회사 돈이 크게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 종이 몇 장 쓴다고 환경이 당장 오염되는것도 아니잖아? 업무에 더 도움이 된다면 그 길을 따라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바로 직장인으로서의 성실성이야.
디지털 파일은 말이야, 내 손에 잡히는 게 없으니까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든단 말이지."
단지 자신의 심리적 안정과 낡은 습관을 위해 멀쩡한 종이 수십 장과 나의 아침 출근 시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또 다른 날, 나는 중요한 회의 자료를 작성해 제출했다.
정 부장은 내용에는 아무 말이 없더니, 폰트 문제로 나를 불렀다.
"현우 씨, 이 폰트가 뭐지? 맑은 고딕? 이걸 왜 써? 회의 자료는 '바탕체'가 기본이야.
그리고 이 여백, 0.5mm 늘려야 보고서가 무게가 실리지.
이게 바로 디테일이야, 현우 씨. 이런 작은 차이가 보고서의 무게를 만드는 거야."
나는 밤새도록 자료의 논리적 오류나 기술적 개선 효과를 고민했지만, 정 부장의 머릿속은 폰트와 여백이 시스템의 전부라고 믿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의 비효율은 단순히 설비의 노후 문제나 예산 부족이 아니었다.
낡은 권위에 갇혀버린 인간들의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시스템 그 자체였다.
정 부장이 원하는 것은 혁신적인 개선이 아니라, 질문 없이 낡은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복종적인 톱니바퀴'였다.
정 부장은 그러한 톱니바퀴들이 모여야, 더 오랫동안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며 정년까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의 시간과 재능은 이 비합리적인 권위의 사소한 심기를 맞추는 데 모두 낭비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