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바야시 아키라, 부서진 향주Âme Brisé

신세계를 소개합니다

by 백경
“멜랑콜리는 저항의 한 방식입니다.” 유가 단언했다. “이성을 잃어버린 세상, 악마로 인해 개인성 박탈로 이끌려 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겠어요? 슈베르트는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동시대인이에요. 내가 마음 깊이 감동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1938년 11월 6일, 일요일.

음악 애호가인 미주사와 유는 중국인들과 함께 현악 4중주단을 꾸려 <로자문데>의 첫 부분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내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낌새를 알아차린 유는 아들을 장롱에 숨긴다.


열한 살이던 소년 미주사와 레이는 그날 장롱에서 작은 구멍을 통해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중일전쟁 초입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을 모은 유는 주동자로 지목되고 군인들에게 끌려간다.


일본 하사는 군홧발로 유의 바이올린을 짓밟아 부서 버린다.

이후 그들이 모인 곳에 온 쿠로카미 중위는 폭력적인 군인들을 보냈다.

그는 음악 애호가인 유를 존중했다.

그리고 유에게 바이올린 곡 한 곡을 정중하게 부탁한다.


<론도형식의 가보트>를 듣고 나서 상관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4중주단을 체포하게 된다.

그들이 떠나간 후 쿠로카미는 레이가 있는 장롱을 열게 된다.

두 사람은 아주 짧은 찰나 만나게 되고 쿠로카미는 부서진 유의 바이올린을 소년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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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소년은 고아가 되었다.

유의 친구인 필립과 이자벨의 양아들이 되어, 자크 마이야르란 새로운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살아간다.


소년은 1938년 11월 6일, 그날에 갇혀 있다.

모국어였던 일본어가 흐릿해졌다 하더라고 그 사건은 소년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소년이 그 사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소년은 악지 제작자가 되었고 일생의 숙제로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복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바이올린 복구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 온전한 유의 바이올린이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복구보다는 재제작에 가깝다.) 나이 든 레이는 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 한다.




쿠로카미 중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의 외손녀 야마자키 미도리와 연이 닿는다.

그리고 그날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중국 여성 양펜과도 연락이 닿는다.


등장인물이 많지 않지만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는 게 예사롭지 않다.

촘촘하고 감성적이다.


처음 말한 하나의 사건, 1938년 11월 6일. 레이에게 있어서는 평생을 지고 갔던 그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아버지의 바이올린 복원, 아버지를 존중했던 군인 쿠로카미 중위의 외손녀, 야마자키 미도리와의 만남, 유가 모르는 진실을 알고 있는 양펜과의 만남은 결국 1938년 11월 6일, 도쿄를 재조명한다.


책을 읽으면서 강렬하게 느꼈던 건 ‘트라우마’와 ‘치유’다.

독자는 레이가 알지 못하는 사건의 전말을 이미 시작부터 알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걸을 풀어가는 방식이다.

씻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트라우마를 지닌 레이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살고 있는가?

씻을 수 없는 지독한 사건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지금은 흐뭇하게 웃을 수 있는 첫사랑 같은 사건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사건에 뿌리를 두고 인물들의 인생은 제각기 뻗어 나간다.

레이가 그랬고 양펜이 그랬듯이.


어떤 사건은 내게 평생을 끌고 가는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는 지난날의 해프닝일 수도 있다.


난 여기서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날의 전말을 전부 알고 싶어 할 테고,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위로해주고 싶어 할 테다.

어느 것 하나 정답은 없다.

타고난 기질과 성품에 달라지는 거니까.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혹여나 내 소개로 책을 읽게 된다면 각자만의 위로 방식을 찾길 바란다.



나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음악은 그것이 설령 다른 문명, 심지어 전쟁 주우인 적국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인류 자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조금 다른 이야기로 빠져보려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첫 번째 흥미로운 사실, 책을 번역한 분의 평에서 나온 부분이다.

향주를 뜻하는 Âme이다. 이는 현악기 몸판의 앞판과 뒤판 사이에 놓여 있는 작은 나무 조각으로 균질한 진동으로 음질과 전파가 보장되도록 한다. 프랑스어로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부서진 향주는 열한 살에 큰 사건을 겪으며 레이의 ‘부서진 영혼’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어 Âme를 보고 라틴어 Anima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프랑스어를 모르는 지라 지레짐작만 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진 것이다.



두 번째 흥미로운 사실. 이건 개인적인 사견이다.

난 책을 볼 때, 표지 다음 목차를 본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명상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악보에서 빠르지만 지나치지 아니하게 연주하라

안단테: 느리게 연주하라

미뉴에트: 알레그레토: 조금 빠르고 생기 있게: 조금 빠르게

알레그로 모데라토: 적당한 빠르기로


에필로그



에필로그를 제외하고서 보면 소설의 구성 단계와 닮아 있다.


명상 - 발단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 전개

안단테 - 위기

미뉴에트: 알레그레토 - 절정

알레그로 모데라토 - 결말


어쩌면 악보에서 빠르기를 지시하는 용어를 사용해 글의 구성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작가님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끝으로 이 책을 추천한 I 씨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평소라면 목차를 보고 해석하기도 전에 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추천 덕분에 책을 읽고 감상평을 할 수 있으니 기쁘다.

내 글을 읽는 분들도 관심이 있으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미즈바야시 아키라

1951년 생, 도쿄의 국립 외구구어 문화 대학(UNALCET)에서 수학한 후 1973년 프랑스로 떠나 몽펠리에의 풀발레리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다.


이 책은 2020년 프랑스 전역 2,000여 개의 ‘독립서점상 연합’이 해마다 선정하는 서점인들의 상(Prix des Librairies)과 2021년 음악가들의 문학상(Prix litteraire des musiciens)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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