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인생 연구

신세계를 소개합니다

by 백경

작년 말, 공주에 있는 독립서점, 블루프린트북에 들렸다.

카페 입구를 찾지 못해 무심코 건물을 반바퀴 돌아 철계단을 올라갔다.

3층에 마련된 독립서점은 아담하고 따뜻했다.

무심코 수많은 책 중 내 눈길을 끈 두 가지 책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정지돈 작가의 「인생 연구」이다.


공포 소설 비슷한 걸 쓰고 싶은데 마땅한 소재가 없었다. 친한 동료 작가에게 무서운 이야깃거리 없냐고 물었다.


이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한동안 공포 이야기에 푹 빠져 살던 기간이 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괴담을 소비했다.

그래서일까.

저 문장에 덜컥 책을 샀다.(책을 살 때, 표지 다음 목차를 보는 편인데 오랜만에 그것마저 지키지 않았다.)


「인생 연구」는 여덟 개의 단편으로 엮어진 단편집이다.

그중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소개해보겠다.

단편집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블룸 앤 블룸 L.P.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대단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문장은 블룸타워 로비의 우주비행선 무양의 모니터에서 24시간 쉬지 않고 번쩍거린다.
하지만 직원이라면 누구나 진짜 모토가 뭔지 안다.

‘남의 돈으로 내 일을 하자.


화자가 입사한 블룸 앤 블룸 본사인 블룸타워는 맨허튼에 위치해 있다.

고층 빌딩을 오가는 다섯 개의 엘리버에터 그룹이 있었는데 연봉과 직급 순으로 올라갈 수 있는 층이 달랐다.

화자는 두 번째로 높은 45층에서 60층에 배정을 받는다.

네 번째 그룹은 61층에서 70층을 배정받았고 그건 이 타워의 꼭대기였다. 그럼 다섯 번째 그룹은 어디로 출근하는가.


그들은 지하로 출근한다고 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지하층 버튼이 없었다. 지하로 가는 계단도, 통로도 본 적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자는 여느 때처럼 출근했지만 카드키가 먹히지 않았다.

간부 서머스는 화자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간다.

입사 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엔 문이라고 하기엔 특별한 회색 직사각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드키를 찍자 문이 열렸다.


문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둠의 농도가 조금씩 달랐다. 검은 사각형 안에 검은 사각형 안에 검은 사각형이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에 빛이 없는 느낌인건가 싶다.


그 안엔 일정한 격자로 이루어진 칸막이에 사람들이 있었고 모니터로 무언가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들이 하는 건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름의 기계를 조작하는 일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본뜬 듯했다.

이 기계는 미로였는데 중심에 암소가 있었다.

규칙에 따라 미로를 통과해 암소에 도달하면 됐다.


화자는 그날 이후 지하층에서 일을 했다.

연봉은 예전의 두 배가 되었다.

암소를 찾은 직원은 임의의 방 번호가 주어졌다.

배정받은 방이 나올 때까지 복도를 걸어간 뒤, 그 방에 들어가 경로를 다시 입력하고 돌아와서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네 번째로 암소를 잡은 날, 화자는 특별한 일을 겪게 된다.

평소처럼 번호 방에 들어갔다 온 날, 복도의 길이가 궁금했다.

오랫동안 걸어 복도 끝에 도달한 그는 불타고 있는 풍경을 보게 된다.


“여긴 뭐예요?”
“어떤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 실험하는 곳이지.
좀 복잡하지만 매우 유용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게 된 건 그것이 예측하면 할수록 증폭된다는 사실이야.


화자는 서머스를 따라간다.

복도 끝에 하나의 문이 보였고 문은 거대했다.


여기서 선택해야 돼. 문을 열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거기가 어디가 될진 몰라. 문을 열지 않으면 여기에서 영원히 살아야 돼.


그 선택에 화자는 되물었다.


“무슨 의미야?”
“가능성.”




정지돈 작가 특유의 흡입력 있는 문장과 기묘함이 묻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인생 연구」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이야기는 <베티 블루>다.

왜 이 이야기를 리뷰하지 않았을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당신이 직접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해서다.

둘째는 다음 이유에서다.


2023년 3월 1일부터 3월 10일까지 유료서비스인 챗GPT 플러스를 사용해 소설 작업을 했다.
정해진 설정은 단 한줄의 제목이었다.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


정지돈 작가는 AI를 이용해 이야기를 창조했다고 밝혔다.

AI를 이용한 글쓰기가 참신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이미 AI를 이용한 글쓰기는 경계의 대상이면서 우리의 삶에 녹아들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AI를 경계할만한 작가가 이를 이용해서 출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어낸 사유가 좋았다.


챗GPT는 원고지 5매 이상 일관성 있게 서술하지 못했고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라는 제목 아래, 다양한 설정과 인물을 반복해서 제시했고,

챗GPT가 서술하는 짧은 이야기 중 연결될 수 있거나 흥미로운 부분을 추출하고 배열해서 소설을 만들었다고 했다.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것은 챗보다는 나의 변화였다.
챗GPT와 상호작용하며 소설을 쓰는 일은 나의 문장을,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그에게 맞추는 일에 가까웠다.


정지돈 작가는 실험을 통해 인간이 훨씬 유연하다고 말했다.

유연함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과 외부에 대한 인식 사이에서 변화와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능력이라 했다.




이 지점에서 정지돈 작가의 마지막 이야기는 단순한 실험작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존재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우리는 끝없이 갈라지는 두개의 복도 앞에 서 있다.

우리가 매일 선택한다고 믿는 것들이 어쩌면 이미 설계된 미로 안에서 반복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남는다.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고.

더 좋은 곳에 살기 위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일에 매달리고.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위험에 노출되는 삶.

아무 의심 없이 반복하고 있는 행동들이 과연 맞는 건가.

그 선택이 정말 내 것이었을까.


끝없이 묻고 답하며 각자만의 답을 얻길 바란다.




정지돈 작가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2016년 문지문학상, 2022년 김현 문학패, 2023년 김용익 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영화 연출을 공부해 영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게 녹아있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