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친절하게 밑줄 그어준 것들

너무 선명해서 피곤한 낮을 건너, 적당히 흐릿한 밤으로

by MOYA


사진은 흔히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끔 대낮의 쨍한 직사광선은 너무 정직해서 탈이다. 세상의 모공까지 다 보여주는 고화질 거울 같달까. 피로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해가 지고 난 뒤의 시간을 노린다. 낮이 모든 것을 발가벗겨 '설명'하려 든다면, 밤은 거대한 어둠으로 적당히 가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살짝 보여준다. 나는 밤이 부리는 그 은근한 '밀당'의 기술이 좋다.



어느 늦은 밤, 높은 곳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낮 동안 전투적으로 클락션을 울려대며 사람들을 토해내던 도시는, 어둠이 내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얌전히 숨을 고르고 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들이 마치 땅 위에 내려앉은 은하수 마냥 아련하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딱 그 짝이다. 저 불빛 하나하나마다 누군가의 치열한 야근과 육아 전쟁이 벌어지고 있겠지만, 적당히 거리를 둔 이곳에선 그저 아름다운 야경의 재료로 보일 뿐. 가끔은 이런 예의 바른 거리감이 주는 평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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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에너지가 다 소진되지 않은 거리로 내려왔다. 횟집 간판들의 저 투박하고 정직한 폰트가 어둠 속에서 보니 제법 힙(hip)하다. '유람선'이니 '뱃머리'니 하는 이름들이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옛날엔 야간 촬영이라 하면 '노이즈와의 전쟁'이었다. 어떻게든 저 자글자글한 입자들을 매끈하게 다림질하려고 포토샵과 씨름을 했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빛이 부족해 힘겨워하는 센서의 아우성 같은 이 거친 질감이 좋다.


'감성'이라는 단어로 기술적 한계를 퉁치려는 건 아니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너무 완벽하고 매끈한 것보단, 가끔은 주근깨처럼 빈틈이 있는 사진이 더 사람 냄새나지 않나. 저 자글자글한 노이즈 사이로 비릿한 바다 내음과 알싸한 소주 냄새가 배어 나오는 것만 같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정가고 마음이 쓰이는, 딱 그런 밤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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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불빛을 뒤로하고 항구에 닿으니, 밤은 예술가 행세를 시작한다. 칠흑같이 검은 바다라는 캔버스 위에 배에서 흘러나온 불빛 하나를 툭 던져주고는, 물결더러 알아서 추상화를 그려보라고 시킨다.


일렁이는 물결에 따라 길게 늘어지기도, 잘게 부서지기도 하는 빛의 춤을 멍하니 바라본다. 남들이 보면 컴컴한 데서 청승맞게 뭐 하냐고 하겠지만, 원래 감성이란 남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걸 굳이 멈춰 서서 바라보는 수고로움에서 오는 거니까.


복잡했던 머릿속을 잠시 저 물결에 외주 맡겨본다. 뇌를 잠시 꺼두는 시간, 이른바 '물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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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밝고 선명해서 피곤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해상도를 좀 낮추고, 노이즈 좀 껴도 괜찮은, 너그러운 밤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밤,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고 있나? 스마트폰의 블루라이트 말고, 창밖의 진짜 불빛을 한번 쳐다보시라. 어둠이 당신을 위해 친절하게 밑줄 그어준, 작지만 반짝이는 그 부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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