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위, 빨래를 걷다 마주한 엄마의 화려한 셔츠를 보며
유독 볕이 좋았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바짝 마른 빨래를 걷으러 엄마와 함께 옥상에 올랐다.
우리 집은 지대가 꽤 높은 곳에 있다. 덕분에 그리 높지 않은 건물 옥상임에도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진다. 빽빽한 빌라들 너머로 보이는 초록의 산 능선. 바람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햇살이 좋아서였을까. 엄마는 빨래를 걷다 말고 한동안 멍하니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그 무방비한 뒷모습을 조용히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보정하려고 열어본 모니터 속 사진 한 장. 파란 하늘과 초록의 산, 그리고 그사이에 서 있는 엄마. 그런데 문득, 엄마의 등에서 꽃이 피어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촌스럽다고만 생각했던 엄마의 알록달록한 꽃무늬 셔츠가 그날따라 유독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엄마들은 참 꽃을 좋아한다. 길을 걷다 이름 모를 들꽃이라도 발견하면 어김없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시고, 프로필 사진은 늘 화사한 꽃밭이다. 옷장에는 누가 봐도 "나 꽃이야!"라고 외치는 듯한 화려한 패턴의 옷들이 가득하다. 젊은 날엔 세련된 무채색을 좋아했을 소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원색의 꽃무늬를 서슴없이 입게 되었을까.
문득 가수 김진호 님의 <가족사진> 가사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 버렸던..."
그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니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엄마들이 그토록 꽃을 사랑하는 이유를. 당신의 젊음과 시간을 거름 삼아 자식이라는 꽃을 피우느라, 정작 본인은 흐드러지게 피어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 꽃이 되지 못한 마음을 옷에라도, 사진첩에라도 가득 채우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 애달픈 마음을 자주 잊는다. 한 번 쓰고 버리면 될 물티슈를 굳이 빨아서 다시 쓰는 모습에 궁상맞다 타박하고, 냉동실에 들어가면 절대 상하지 않는다는 '냉동실 만능설'을 맹신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밥 먹어라" 하는 소리에 나가보면 숟가락은커녕 반찬 뚜껑도 안 열려 있을 때, 그 별것 아닌 일에 우리는 왜 그리도 쉽게 짜증을 내는 걸까.
사진 속 엄마의 등은 생각보다 작아 보인다. 그 작은 등에 핀 화려한 꽃무늬가 오늘은 왠지 슬프도록 아름답다.
우리는 안다. 온갖 짜증을 부리고 돌아선 뒤에도, 결국 '엄마'라는 두 글자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엄마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눈물 치트키'가 된 이유는, 아마도 우리를 위해 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 뒷모습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저녁엔 냉동실 가득한 검은 봉지들을 보며 한숨 쉬는 대신, 엄마의 화려한 꽃무늬 셔츠가 참 예쁘다고 말해줘야겠다. 당신은 여전히,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