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홀로 지내던 한 달간 의문의 소리가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반노 씨 댁의 시베리안 허스키 미사 짱의 울음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밤마다 울리는 치링치링 하는 종소리와 웅얼거림이었다.
깜깜한 밤, 가구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캐리어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두드리고 있으면, 또각또각 울리는 키보드 소리를 뚫고 정체불명의 비명과 종소리, 웅얼거림이 낡은 집의 모든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공명을 일으키는 거다. 그것도 묘지 바로 옆 집에서 말이다. 남편의 공포를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특히 우리 동네는 저녁 8시만 되어도 인적이 끊기다시피 했다. 집 앞 도로의 맞은편엔 주택 대신에 큰 대나무 숲과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흔들며 내는 소리는 밤이면 더 크게 울렸고 스산함을 더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얼마나 상상력을 자극했겠는가.
다행히 종소리와 웅얼거림의 정체는 내가 온 후 밝혀졌다. 우리 집 왼편에 바짝 붙어 있던 2층 건물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아침 일찍 2층 테라스에서 빨래를 널고 있으면 그 댁 창문 너머로 그 소리가 잘 들렸다. 치링치링 종소리가 울린 후 주문을 외우는 듯한 소리. 그랬다. 자민당과 연합 정권을 이루고 있는 한 정당의 지지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종교를 믿고 계셨던 것이다.
그 건물 2층에는 노부부가 살고 계셨는데 자주 우리 집에 오셨다. 오실 때마다 과자나 과일, 아기 장난감 등과 함께 한국 기사가 실린 종교 신문을 가지고 오셨다. 특별히 포교의 의미는 없었던 것 같고 한국과 관련된 것이면 우리가 기뻐할 것이라 여기셨던 것 같다. 지금도 이 분들을 특이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처럼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종교를 밝히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26년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딸아이를 볼 때마다 예뻐해 주셨는데, 거의 2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우리 아이를 보고 “유우린 군!”하고 부르시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 사내아이인 줄 알고 계셨던 것이다.
1층은 40대 후반 정도의 부부가 운영하는 경양식 카페였다.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나는 한번 정도밖에 가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분들께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두 가지 감동 사연이 있다.
교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분지 도시이다. 여름이면 습한 더위가 37도, 38도를 웃돌았다. 우리 집의 낡은 에어컨에서는 더운 바람이 나올 정도였다. 요즘은 기후변화로 일본의 여러 도시들의 여름 기온이 이 정도는 보통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26년 전엔 정말 특별히 더운 날씨였다.
처음 겪는 혹독한 교토의 한 여름날 오후, 부인이 생맥주 두 잔을 쟁반에 담아 우리 집에 오셨다. 술을 즐겨하지는 않아서 맥주는 쓰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 생맥주는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고 달콤했다.
또 한 번은 부인이 생물의 큰 도미를 가져다주셨다. 남편 분이 낚시가 취미라 전 날 낚은 것이라며 깨끗이 손질한 싱싱하고 잘 생긴 도미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렇게 큰 생선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 부인은 소금만 뿌려서 프라이팬에 굽거나 가스레인지에 그릴이 있으면 거기에 구워도 된다고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그때는 오븐도 없었고, 지금처럼 검색만 하면 요리 방법을 쉽게 알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프라이팬도 작아서 가스레인지 그릴에 굽는 게 제일 손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양면 그릴이 안 되는 탓에 뒤집어야 했다. 그릴을 앞으로 당겨 꺼내면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칼집을 넣은 살 부위가 부풀어 올라 그릴 윗판에 살이 걸려 다 바스러지고 말았다. 그 잘생긴 도미가 처참한 모양으로 식탁에 올랐다. 소금만 뿌렸어도, 모습은 비참했어도, 맛은 최고였다.
토막을 내서 조리거나, 프라이팬에 굽거나, 너무 크면 잘라서 보관했다가 먹었으면 될 것을, 왜 굳이 한 마리를 한 번에 조리하려 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이웃집 선의를 물거품으로 만든, 평생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불 킥 사건의 하나가 되었다.
옆 집의 1층과 2층의 이웃이 우리에게 따뜻한 친절을 베풀며 매번 따로 오신 탓에 이 두 집의 관계를 상당히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거의 귀국할 즈음이 되어서야 이 분들이 부모자식 관계였다는 걸 알았다. 서로 들락거리는 것을 본 적도 없었고, 생김새도 닮지 않아서 약간의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뒷집에는 반노 씨의 여동생 부부가 살고 계셨다. 이것도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말이다. 뒷집 부인이 반노 씨 집에 자주 가시길래 그저 친한 사이로만 생각했다. 성도 다르니 말이다. 부인은 기모노 관련 일을 하시는 것 같았고, 남편 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 끝까지 알 수 없었지만, 반노 씨 부인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피아니스트라고 하신 적이 있어서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자전거 마니아라는 것은 귀국 후 연하엽서를 주고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이 분과는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는데 가끔 한국 민요나 가요를 LP 플레이어 전축으로 크게 틀어 놓기도 하시고, 주로 클래식 음악이 늘 들렸다. 그런 걸 보면 피아니스트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는 사실은 우리 집과, 반노 씨 집, 카페 집, 피아니스트 집 모두 주소가 똑같다는 것이다. 번지까지 같아서 가끔 잘못 배달된 서로의 우편물을 전해주러 다니기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의 이웃은 아니었지만, 같은 도로변으로 약 300~4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약국이 있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약국 집 부인도 매우 자주 우리 집에 오셨다. 이 분이 믿는 한국인이 총재로 있는 세계적 종교 때문인 것 같은데 포교하러 오시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어느 날은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라면서 작은 성배 같은 것에 포도주를 따라주시며 마시라고 해서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결국 무교인 남편이 내 것까지 마셔줘서 마무리가 되었다. 그 후에도 미술 전시회에 함께 가지고 하셔서 감기 핑계를 댔더니 쏜살같이 홍삼정 진액을 병째로 들고 오신 적도 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선의에 대한 충분한 감사도, 또 어떤 선의에 대한 적절한 거절도 제대로 못한 채, 교토에서 3년을 보냈다. 우리의 교토 생활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주신 이웃들께는 감사라는 말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런 게 있다. 교토의 우리 이웃들은 일본 다른 곳에서는 만나지 못한 참 별난 구석이 있다. 우리가 아는 그 ‘정’이 그곳에도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