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시적 폭력
사람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일정한 사이클을 거치며 상처와 아픔을 달램과 동시에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자 여행도 하고, 책도 보고, 명상도 하고, 종교를 갖기도 한다.
지친 내 마음의 안식처 또는 위로가 되어 줄 것 같은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상처로 돌아오기도 한다.
상대방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십을 만들고 표적지에 목표물도 없이 군중심리에 따라 화살을 무자비하게 날린다. 일명 뒷말, 험담, 악플 등
결국, 영문도 모른 채 화살을 맞는 사람은 그대로 쓰러져서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한 동안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 장자연 씨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자살을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그녀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을까?
그녀는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통해 마음을 위로받고, 아픔 마음을 치유받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그녀가 손을 내밀 곳이 없었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간혹 언론 매체 등에서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곤 한다. 자살을 선택한 연예인을 직접 만나 본 적도 없고, 어떤 성품 인지도 모른 채 SNS 등에서는 한 사람의 인격을 깎아내린다.
사실에 근거한 비난이 아니라,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으로 비난의 화살을 마구 쏘아 댄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이런 일들이 언론 매체에 보도되는 뉴스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도 많이 일어난다. ‘왕따’라는 말은 익히 들어 봤을 것이다. ‘왕따’는 이제 새삼스러운 단어도 아니고 사전에 까지 등재가 되어 있다. ‘왕따’는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힘이 있는 학생들이 약한 학생을 괴롭히고 학교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살인 범죄가 지금도 계속 자행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살인 범죄가 학교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이라는 공동체에서도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팀 동료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술자리나 커피 타임을 이용해서 아무 이유 없이 껌 씹듯 마구 씹는다.
씹기도 하고 씹기를 당하기도 하는 이와 같은 경험은 직장인이라면 한두 번쯤은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살인들이 삶에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 2000년대 초반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당시 이 영화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극찬을 받았던 영화다. 가시적인 폭력이 아닌 비가시적인 폭력의 무서움을 영화로 표현하였다.
‘주인공 오대수’는 15년간 8평이라는 독방에 감금을 당한다. 가둔 남자는 ‘이우진’. 주인공 오대수는 왜 본인이 독방에 갇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자신이 무심코 한 말과 행동으로 본인을 가둔 남자 ‘이우진’의 누나가 자살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는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가 타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이 되는지를 명확히 보여 주었다.
작위적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어 호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뭘까 개인적으로 궁금한 적이 있었다. 왜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에 관심을 갖을까? 사실도 아니면서 왜 사실처럼 이야기할까? 있는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부분에 확실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다양한 심리 서적과 교육 등을 통해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많은 사람이고, 어릴 때 아픈 상처가 많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의 말을 하는 이를 옹호하고 위로하라는 것이 아니다.
학교, 직장, 사회생활 속에서 누군가 타인의 말에 의해 마음이 아프다면 지금부터라도 아프지 않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
쉽지 않겠지만 나의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용기를 갖고 상대방에게 이야기해보자.
“당신 때문에 내 마음이 많이 아프고 불편하네요.”
“이제부터 그러지 마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