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을 지나 팔레 루아얄(Palais Royal) 인근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즐기다 보면, 발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우리가 밟고 있는 파리 1구의 차가운 보도블록 아래 27m 깊이에는 전 세계가 탐내는 거대한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떠날 시간 여행의 목적지는 프랑스 경제의 심장이자, 가장 깊은 비밀을 간직한 곳, 바로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 본점 지하의 금고 '라 수테렌(La Souterraine)'입니다.
이야기는 약 100년 전인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자산인 금을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한 요새를 구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프랑스어로 '지하의'라는 뜻을 가진 La Souterraine(라 수테렌) 입니다.
이 거대한 지하 도시는 3년 동안 1,200명의 노동자가 밤낮없이 매달려 완성했습니다. 그 규모는 가히 압도적입니다. 약 11,000m²에 달하는 면적은 축구장 1.5개가 들어갈 정도이며, 658개의 거대한 기둥이 6.5m 두께의 천장을 받치고 있죠. 이 공간에 들어서면 마치 중세의 수도원이나 대성당에 온 듯한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가 흐른다고 합니다.
라 수테렌은 프랑스 경제의 중추이자, 건축학적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15만 톤의 토사를 파내고 2만 톤의 시멘트를 쏟아부어 만든 이 공간은
단순한 금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금고가 전설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1938년, 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당시 프랑스 은행장은 나치가 파리를 점령할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결단력을 발휘하여 금고에 있던 4,800톤의 금을 비밀리에 대피시키기 시작합니다. 국가의 보물인 금을 나치의 손에 넘겨줄 수 없다는 위기에서 발현된 그의 결단이었습니다.
이른바 '물고기 작전(Operation Fish)' 이라 불리는 이 이송 작전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습니다. 수백 대의 트럭과 군함을 동원하여 금괴를 캐나다,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카르(세네갈)로 분산 이송했죠. 1940년 6월,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여 승리에 취해 이 금고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먼지만 날리는 텅 빈 공간뿐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국가의 자산을 지켜냄으로써 전후 재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라 수테렌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보안 시스템의 핵심은 Sécurité(세큐리테 - 보안) 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7톤 무게의 강철 문과 17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블록이 겹겹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보안상 극비로 분류된, 단 5명의 인원만이 접근 권한을 가진 다중 열쇠와 생체 인식 시스템을 통과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철저한 보안이 온라인 세계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구글 맵(Google Maps)으로 이 구역을 살펴보면 프랑스 은행 본점 일대의 이미지가 유독 희미하게 블러(Blur) 처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보안법에 따라 국가 주요 안보 시설은 위성 이미지에서 식별이 어렵게 가공되기 때문이죠.
예전보다는 훨씬 줄었지만 현재 이곳에는 약 2,437톤의 금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는 세계 4위 규모입니다. 가치로 환산하면 약 260조 원에서 290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라 수테렌은 단순히 금만을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국가 비상시에는 루브르 박물관의 보물들도 이곳으로 대피합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인들은 금만큼이나 예술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첩이나 프랑스 국왕의 보석들이 전쟁의 포화를 피해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 보물들의 가치는 금전적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천문학적 수준입니다.
특히 1932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이곳을 방문한 뒤 "모스크처럼 신비롭고 거대하다"라며 감탄했습니다. 경제적 가치(Fact) 위에 역사적 서사(Narrative)가 덧입혀지면서, 라 수테렌은 단순한 금고를 넘어 프랑스의 정신을 보관하는 박물관이 된 것입니다.
다음에 파리 여행을 가신다면, 팔레 루아얄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잠시 발밑을 상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발아래 27m 깊이에서는 약 260조 원의 금이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라 수테렌은 프랑스 대통령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영역입니다. 보이지 않기에 상상력을 자극하고, 닿을 수 없기에 전설이 됩니다. 구글 맵의 흐릿한 블러 처리처럼, 결국 가장 귀한 것들은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는 법이죠. 파리의 화려한 지상을 지탱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에서 수백 년간 침묵을 지켜온 이 금빛 성전은, 보이지 않는 본질이 가장 찬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