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병이 750ml 진짜 이유? 갤런과 리터 사이의 타협점
주말 늦은 오후, 파리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의 어느 테라스에 앉아 와인 한 잔을 기울이다 보면 문득 이런 의문이 생기곤 합니다. "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와인병은 1리터도, 500밀리리터도 아닌 750밀리리터일까?" 우유나 물처럼 딱 떨어지는 1리터도 아닌, 이 묘한 750ml라는 숫자는 단순히 우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흥미로운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요?
사실 이 75cl (Soixante-quinze centilitres)라는 용량 뒤에는 프랑스의 장인 정신과 영국의 실용주의가 결합한 아주 재미있는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와인 한 병에 담긴 19세기의 전략적 계산과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보겠습니다.
와인병의 크기를 둘러싼 낭만적인 전설들, 우리가 와인병의 규격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듣게 되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과거 유리 직공들의 폐활량(Capacité pulmonaire)에 맞춘 크기라는 설이죠. 기계가 발명되기 전, 입으로 직접 유리를 불어 병을 만들던 시절에 숙련된 직공이 숨을 멈추지 않고 한 번에 불어낼 수 있는 가장 적정한 부피가 바로 750ml였다는 설명입니다. 듣고 있으면 왠지 꽤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또 다른 가설은 와인 한 병의 양이 성인 두 명이 저녁 식사를 즐기며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기에 가장 완벽한 분량이라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L'art de vivre'(삶의 예술)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 낭만적인 이유가 있을까 싶죠. 하지만 아쉽게도 이 규격이 표준화된 진짜 이유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관습은 대개 낭만적인 이유로 포장되지만, 그 뿌리에는 언제나 생존과 효율을 위한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과거의 관습은 대개 낭만적인 이유로 포장되지만, 그 뿌리에는 언제나 생존과 효율을 위한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주문서와 영국의 도량형, 진짜 이야기는 19세기, 프랑스 보르도(Bordeaux)의 와인 상인들이 최대 고객이었던 영국(Royaume-Uni)과 거래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프랑스 와인을 지독하게 사랑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용하는 단위가 서로 달랐다는 점이죠. 프랑스는 리터(Litre)를 썼지만, 영국은 임페리얼 갤런(Gallon impérial)이라는 단위를 사용했습니다. 1갤런은 약 4.54리터에 해당합니다.
와인을 수출하던 프랑스의 네고시앙(Négoce, 와인 도매상)들은 매번 이 복잡한 단위를 변환하느라 머리가 아팠을 겁니다. 상업적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들은 영국의 갤런과 프랑스의 리터 사이에서 '계산이 가장 깔끔하게 떨어지는 지점'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해결책이 바로 1갤런을 정확히 6병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1갤런(약 4.54리터)을 6으로 나누면 약 0.75리터, 즉 우리가 지금 마시는 750ml 병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전략적 수치 225리터와 300병의 마법, 이 계산법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병의 크기만 정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와인을 대량으로 운송하던 오크통, 즉 배럴(Barrique)의 크기도 이 공식에 맞춰 최적화되었습니다. 보르도의 표준 오크 통인 '바리크'는 225리터들 이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225리터들이 한 통을 750ml 병에 옮겨 담으면 어떻게 될까요? 놀랍게도 정확히 300병(300 bouteilles)이라는 숫자로 딱 떨어집니다.
이 수치화는 당시 물류 시스템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오크통 1통은 300병이고, 이건 곧 영국식으로 50갤런이다"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복잡한 계산 없이도 수출 물량을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우리가 와인을 살 때 한 박스에 6병이나 12병씩 들어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박스(12병)를 모으면 정확히 영국 단위인 2갤런이 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비용 계산이 한결 쉬워졌고, 수백 년 전의 수출 공식이 오늘날 우리의 장바구니 속 와인 박스 크기까지 결정하게 된 셈입니다.
성서 속 왕들의 이름을 빌린 거대한 갈망, 750ml가 전 세계적인 표준이 되었지만, 와인병의 세계에는 이 숫자의 배수로 만들어진 아주 커다란 병들도 존재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대형 병들에 고대 근동 (Ancient Near East, 현재의 중동 지역)의 왕들이나 성서 속 인물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크기를 키우는 것을 넘어, 그 안에 '권위'와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었던 유럽인들의 인문학적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 병 2개 분량인 1.5리터는 '위대함'을 뜻하는 매그넘(Magnum)이라 부르고, 4병 분량인 3리터는 유다 왕의 조상인 제로보암(Jeroboam)이라 부릅니다. 더 나아가 15리터나 되는 거대한 병에는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기도 하죠. 축제나 승리의 순간에 이런 커다란 병을 여는 것은, 단순한 술자리를 넘어 역사 속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와인병의 이름 하나에도 역사를 새겨 넣는 것,
그것이 바로 유럽이 럭셔리와 전통을 만들어가는 방식입니다.
파리지앵의 시선
비즈니스 세계에서 우리는 종종 '나의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 힘이라 믿곤 합니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 와인 상인들이 보여준 750ml의 선택은 정반대의 지혜를 말해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리터' 단위를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인 영국의 '갤런'을 깊이 이해하고 그 사이에서 가장 완벽한 타협점인 0.75라는 숫자를 찾아냈습니다. 나의 가치를 상대의 언어로 제안하는 '전략적 공감'이 이 작은 병 속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또한 이 750ml는 인간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만드는 '적정함'의 미학을 담고 있습니다. 너무 짧지도, 과하지도 않은 이 용량은 와인이 공기와 만나 맛이 절정에 이르는 시간과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여는 시간을 정확히 일치시킵니다. 영국 상인들이 효율을 위해 숫자를 정했다면, 프랑스인들은 그 차가운 숫자를 따뜻한 대화와 예술적 취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결국 차가운 비즈니스 공식이 세월을 견디며 우아한 '전통'으로 승화된 것이죠.
결론적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750ml 와인병은 단순한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배려하며 만들어낸 '아름다운 합의'의 산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