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시슬레 (Alfred Sisley)

인상주의의 가장 투명한 순수성

by M plus Paris

인상주의라는 찬란한 물결 속에서 클로드 모네의 화려한 광채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황홀한 환희에 가려진, 그러나 누구보다 정직하고 투명한 영혼을 지녔던 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그의 삶은 마치 한 편의 비극적인 대서사시와 같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신사의 품격(Dignité)이 깃들어 있습니다. 유복한 영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풍요를 누렸으나 전쟁이라는 거대한 풍파 속에 모든 것을 잃었고, 평생을 지독한 빈곤과 싸우면서도 그의 캔버스 위에는 단 한 번도 절망의 어둠이 내린 적이 없습니다.


Pierre-Auguste Renoir Portrait d'Alfred Sisley (1868)


우리는 오늘, 시슬레가 가난이라는 차가운 현실의 압박 속에서도 어떻게 그토록 따뜻하고 맑은 대기의 빛을 포착해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인상파 동료들과 어떤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뉘앙스'를 완성했는지 그 깊이 있는 인문학적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결핍이 오히려 예술적 순수함으로 승화되는 그 경이로운 과정을 통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자존(Self-esteem)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이야기는 1839년, 파리의 유복한 영국인 저택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슬레의 역사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지역 중 하나였던 파시(Passy) 지구, 보르도(rue de Bordeaux) 거리의 한 저택에서 시작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공 꽃(Fleurs artificielles)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영국인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음악과 사교계를 사랑하던 세련된 여성이었지요. 어린 시슬레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영국식 티타임을 즐기며 프랑스 예술을 호흡하며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바라며 18세의 시슬레를 런던으로 보냈지만, 운명은 회계 장부 대신 구름과 빛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런던 체류 시절, 그는 터너(Turner)와 콘스터블(Constable)의 풍경화에 깊이 매료됩니다. 영국의 대기가 머금은 오묘한 회색빛과 구름의 움직임은 청년 시슬레의 영혼에 잊을 수 없는 미학적 각인을 남겼습니다. 결국 상업학 공부를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온 그는 글레르 아틀리에(Atelier Gleyre)에 입문하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그는 운명적인 동료들인 모네(Claude Monet), 르누아르(Auguste Renoir), 그리고 비극적인 전사를 맞이하게 될 바지유(Frédéric Bazille)를 만나게 됩니다. 이른바 '4인 동맹'이라 불리는 이들은 아틀리에의 딱딱한 규칙을 벗어나 자연으로 나가는 혁명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image.png “Sous la Lampe” (1877) by Marie Bracquemond portrays



전쟁이 앗아간 풍요, 그리고 예술을 향한 처절한 투신



시슬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변곡점은 1870년에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Guerre franco-allemande)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화는 시슬레 가족의 무역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유복했던 '부잣집 도련님'은 하루아침에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화가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시슬레는 이 비극을 예술적 도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오히려 결핍이 그를 야외 광선 아래로 더욱 강하게 밀어냈고, 그는 센 강변의 부지발(Bougival)과 포트-말리(Port-Marly)를 오가며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을 캔버스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280px-Alfred_Sisley,_L%27automne_-_Bords_de_la_Seine_pres_Bougival_(Autumn_-_.jpg?type=w966 Autumn: Banks of the Seine near Bougival” (1873) by Alfred Sisley
1280px-Alfred_Sisley_043.jpg?type=w966 La Machine de Marly, 1873 Ny Carlsberg Glyptotek.



그는 재정적인 압박 속에서도 아틀리에에서의 사후 수정을 거부하고 오직 야외에서(En plein air) 작품을 완성하는 인상주의의 엄격한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갔습니다. 그에게 풍경은 정복하거나 가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 순간 흐르는 공기와 빛, 대기의 떨림을 온전히 담아내야 할 신성한 존재였지요. 가난은 그의 생활을 옥죄었지만,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빛은 그 가난을 비웃듯 투명하고 고결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960px-Sisley-Route_de_Louveciennes.jpg?type=w966 “Route de Louveciennes” (1873–1874) by Alfred Sisley i
1114px-Sisley-Chemin_de_la_Machine_Louveciennes_(1).jpg?type=w966 Chemin de la Machine, Louveciennes, 1873, Musée d'Orsay, Paris
960px-Place_du_Chenil_%C3%A0_Marly,_effet_de_neige.jpg?type=w966 Alfred Sisley, La Place du Chenil à Marly, effet de neige (1876)



하늘과 물의 시인, 뉘앙스의 미학을 구축하다



시슬레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겸손한 관찰'에 있습니다. 그는 모네처럼 빛의 파편을 강렬하게 폭발시키기보다는 자연이 내뱉는 나직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캔버스에서 하늘(Le Ciel)은 대기의 온도를 결정하고 땅과 물의 색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주인공입니다. "나는 항상 하늘부터 시작한다"라는 그의 고백처럼, 그는 지평선을 낮게 배치하여 관람자가 무한한 공간감과 대기의 흐름을 동시에 느끼도록 유도했습니다.



1280px-Alfred_Sisley_002.jpg?type=w966 L'Aqueduc de Marly (1874) Toledo, musée d'art de Toledo.
1280px-Meadow,_Alfred_Sisley,_1875.jpg?type=w966 The Meadow, 1875,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1280px-(Barcelona)_Alfred_Sisley_-_A_Bend_in_the_Loing_-_Museu_Nacional_d%27Ar.jpg?type=w966 A Bend in the Loing, 1892, Museu Nacional d'Art de Catalunya, Barcelona
960px-Alfred_Sisley_018.jpg?type=w966 The Seine at Bougival, 1876,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City



특히 '물(L'eau)'의 묘사에 있어 시슬레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센 강과 생마르텡 운하의 수면 위에 투영된 세상의 역상(Reflets)을 포착하기 위해 그는 아주 세밀한 붓질을 사용했지요. 이는 마치 음악에서 약음기(Sourdine)를 사용한 듯 부드럽고 섬세한 리듬감을 만들어냅니다. 연초록, 먼지 낀 분홍색, 자주색 섞인 회색 등 그가 사용하는 미묘한 톤(Nuance)의 변화는 감상자로 하여금 그림 속 공기를 직접 들이마시는 듯한 황홀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Sisley,_St_Martin_Canal_1870.jpg?type=w966 St. Martin Canal, 1870, Musée d'Orsay, Paris
960px-Alfred_Sisley_008.jpg?type=w966 Le Pont de Villeneuve-la-Garenne (1872)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1280px-Alfred_Sisley_-_Molesey_Weir,_Hampton_Court_-_Google_Art_Project.jpg?type=w966 Molesey Weir – Morning, one of the paintings executed by Sisley on his visit to Britain in 1874
960px-Alfred_Sisley_013.jpg?type=w966 La Baie de Langland, Storr's Rock, Matin, Alfred Sisley, 1897, Musée des Beaux-Arts de Berne.



고독한 거장의 곁을 지킨 예술적 동지들과의 교감



시슬레는 인상파 내부에서도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화가로 통했습니다. 클로드 모네와는 평생에 걸쳐 야외에서 나란히 이젤을 세우고 작업하던 사이였고, 모네가 빛을 '해체'하려 했다면 시슬레는 그 빛을 '고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적 거울이 되어주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1895년의 한 편지에서 시슬레를 향해 "인상주의의 순수한 정신을 끝까지 지킨 화가"라며 그의 예술적 고결함을 높이 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슬레의 사회적 관계에는 늘 경제적 고립이라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서서히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화려한 명성을 쌓아갈 때도 시슬레는 여전히 팔리지 않는 풍경화만을 고집했습니다. 인상파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조차 유독 시슬레를 후원 대상에서 제외했던 점은 여전히 미술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지요. 이러한 고독은 오히려 그를 모레-쉬르-롱(Moret-sur-Loing)의 정적인 풍경 속으로 더 깊이 침잠하게 만들었고, 그의 예술은 더욱 정제된 아름다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모레-쉬르-롱의 정착, 그리고 셔츠 칼라의 자존심



시슬레의 예술적 안식처이자 생애 마지막 불꽃을 태운 곳은 모레-쉬르-롱(Moret-sur-Loing)이었습니다. 1880년경 근처 마을로 이주하며 이 지역과 인연을 맺은 그는, 1889년 정식으로 모레-쉬르-롱 시내 19 rue Montmartre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는 이곳에서 매일 같은 교회를 마주하며 40점이 넘는 연작을 남겼습니다. "건축은 불변하지만, 빛은 모든 것을 바꾼다"라는 철학 아래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변주되는 건축물의 영혼을 기록한 것이지요.


La_havre_muma_sisley_pont_moret.jpeg?type=w966 Le Pont de Moret, effet d'orage, 1887, Musée Malraux, Le Havre


이 시기 시슬레는 극심한 빈곤으로 의사를 부를 돈조차 없었지만, 그의 곁을 지켰던 친구들은 그가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신사의 품위를 유지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셔츠의 칼라(Col)만은 항상 빳빳하고 깨끗하게 다려 입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그를 외면할지라도 스스로 지켜내야 할 마지막 자존심이자, 예술가로서 자연 앞에 서는 최소한의 예의였습니다. 1899년, 평생의 반려자 마리가 떠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그 역시 인후암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1893-CR820CCPP932-The-church-of-Notre-Dame-at-Moret-in-the-sunshine-65x81-MB.jpg?type=w966 Alfred Sisley: 1893, The church (of Notre-Dame) at Moret-sur-Loing, in the sunshine
1280px-Un_soir_%C3%A0_Moret_-_Fin_d%27octobre.jpg?type=w966 Un soir à Moret - Fin d'octobre (1888) Madrid, musée Thyssen-Bornemisza
165283.jpg Alfred Sisley, Les Moulins, effet de neige, vers 1890



파리지앵의 시선: 순수성(Pureté)이 남긴 영원한 클래식



Alfred Sisley vers 1897 (photographie de Joseph P. Jiolo), Paris, collection Sirot-Angel.

시슬레의 삶과 예술을 되짚어보면, 우리는 '순수성'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변신과 유행에의 편승을 요구하지요. 모네가 거대한 담론으로 미술사의 주류를 점하고 르누아르가 화려한 인물화로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 시슬레는 오직 '풍경'이라는 본질적인 한 우물만을 팠습니다. 시대의 유행이나 타인의 성공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필치를 고집스럽게 유지한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그가 고수했던 '깨끗한 셔츠 칼라'는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존중의 최소한이었고,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지켜야 할 품격이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옷깃 하나로 증명하려 했던 그 고집은 역설적으로 그의 회화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과 완벽하게 겹쳐집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뉘앙스'를 지켜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시슬레가 보여준 것은 재능의 승리가 아니라, 바로 태도의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닮은 화가, 영원한 안식에 들다



알프레드 시슬레는 퐁텐블로 숲 인근 모레-쉬르-롱 묘지의 아내 외젠 옆자리에 묻혀 있습니다. 그는 끝내 영국 국적을 유지했지만, 그 누구보다 프랑스의 대기를 사랑했고 그 미묘한 차이를 완벽하게 이해했던 화가였습니다. 그의 캔버스에는 비명 지르는 화려한 빛은 없지만, 대신 고요하게 스며들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깊은 위로가 흐르고 있습니다.


960px-Tombe_d%27Alfred_Sisley_(1839%E2%80%931899)_4.jpg?type=w966 모레쉬르루앙(Moret-sur-Loing) 에 있는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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