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브라크몽 (Marie Bracquemond)

인상주의 3대 여류 화가, 그림보다 먼저 꺾인 영혼

by M plus Paris


인상주의(L’Impressionnisme)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클로드 모네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남성 화가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빛의 기록 뒤편에는 가부장적인 시대 분위기와 가정이라는 틀에 갇혀, 50세라는 이른 나이에 스스로 붓을 놓아야 했던 비운의 천재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마리 브라크몽(Marie Bracquemond, 1840-1916)입니다. 그녀는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로부터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와 더불어 '인상주의의 3대 여류 화가(Les trois grandes dames)'라는 극찬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게만 느껴질까요?


그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여야 했던 남편, 유명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Félix Bracquemond)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리는 헌신적으로 남편을 지원하며 그를 당대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세웠지만, 펠릭스는 아내의 재능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견계하며 그녀의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이름은 남편의 명성 뒤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이제, 지워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복원하며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960px-Braquemond_Afternoon_Tea.jpg?type=w966 Marie Bracquemond, Le Goûter (c. 1880), Collection of the Petit Palais
Marie_Bracquemond_by_Marie_Bracquemond.jpg?type=w966 Marie Bracquemond, Woman Painting at the Easel


재능이라는 이름의 축복, 그리고 고독한 시작, 이야기는 1840년,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해안 마을인 아르장통 앙 랑뒨베즈(Argenton-en-Landunvez)에서 시작됩니다. 마리의 어린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프랑스 곳곳을 떠돌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안한 환경은 오히려 그녀가 그림에 몰입하고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마리는 10대 후반에 이미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불과 17세의 나이에 프랑스 예술가들의 꿈인 국전 '살롱 드 파리(Salon de Paris)'에 작품을 전시하는 성과를 거두었죠. 당시 비평가들은 그녀를 거장 앵그르(Ingres)의 화실에서 나온 가장 유능한 인재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다만 실제 마리와 앵그르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마리는 앵그르의 엄격하고 딱딱한 교육 방식에 답답함을 느꼈고, 결국 "그를 다시는 보러 가지 않겠다"는 기록을 남기며 자신만의 예술적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운명적 만남, 그리고 예술적 충돌의 서막, 1869년 8월, 마리는 많은 예술 지망생이 모여 그림을 공부하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던 판화가(Graveur) 펠릭스 브라크몽(Félix Bracquemond) 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술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빠르게 가까워졌고 결국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마리의 예술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74beca4c-9d56-44f7-bd9d-5aa46f3e66a0_Louvre+hero.jpg?w=1200&h=600&fit=crop&crop=faces&auto=format%2Ccompress&cs=tinysrgb Hubert Robert, Project for the Grande Galerie of the Louvre, 1796, oil on canvas. Public domain
18xx-Tete-de-muse-dr-29x21-DAG-Louvre-iR127iR23M5.jpg?type=w966 Marie Bracquemond: 18xx, Tête de muse, dr, 29×21, DAG Louvre


결혼 초기, 마리는 남편의 권유로 판화나 도자기 디자인 같은 장식 예술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새로운 화풍을 향해 있었습니다. 사실주의를 고집하던 남편의 눈을 피해, 그녀는 1879년 제4차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880년(제5차) 전시에도 작품을 냈지만, 그녀의 화풍이 완전히 무르익어 본격적인 인상주의 스타일로 바뀐 것은 1887년에서 1890년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1887-beneath-the-lamp-Le-couple-Sisley-dinant-chez-les-Bracquemond-a-Sevres-.jpg?type=w966 Marie Bracquemond: 1887, Beneath the lamp



마리에게 인상주의는 단순한 그림 스타일이 아니라,
억눌린 자아를 찾아가는 해방구(Liberté)였습니다.



빛의 해방, 그러나 가정이라는 감옥, 마리는 에드가 드가나 모네 같은 거장들과 교류하며 점차 밝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8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그녀의 그림은 한결 경쾌해졌고, 빛의 찰나를 포착하는 감각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1889년 열린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제8차)는 그녀의 이러한 예술적 성취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무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작가로서 높이 평가받을수록 남편 펠릭스의 압박은 심해졌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했던 남편에게 마리의 새로운 시도는 '미완성된 장난'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의 기법을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집에 온 손님들에게 아내의 그림을 보여주지 못하게 하거나 벽에 걸지 못하게 하는 등 아내의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남편의 끊임없는 질투와 방해는 마리의 창작 의지를 서서히 꺾어 놓았습니다.


%27Terrace_of_the_Villa_Brancas%27,_etching_by_F%C3%A9lix_Bracquemond.jpg?type=w966 Félix Bracquemond, On the Terrace of the Villa Brancas (1876)



침묵을 선택한 50세의 천재, 예술가에게 자신의 세계를 부정당하는 것보다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마리는 약 20년 동안 남편과 싸우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계속되는 가정 불화와 남편의 냉소에 결국 항복하고 맙니다.


1890년, 마리 브라크몽은 50세의 나이에 붓을 내려놓습니다. "나는 이제 지쳤다(Je suis fatiguée)"라는 짧은 말을 남긴 채 절필을 선언한 것이죠. 그 후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26년 동안 그녀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그녀의 천재성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 정작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 재능을 부정당하며 긴 침묵 속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Marie_Bracquemond_Trois_femmes.jpg?type=w966 Marie Bracquemond : Trois Femmes aux ombrelles, Paris, musée d'Orsay.
Bracquemond.sevres.jpg?type=w966 Marie Bracquemond: 1880, Sur la terrasse à Sèvres
1280px-Marie_Bracquemond_-_Le_peintre_(James_Tissot_)_et_son_mod%C3%A8le_dans_un_.jpg?type=w966 Marie Bracquemond : Study from Nature (1880). Private Collection.



파리지앵의 시선



그녀의 침묵을 단순히 한 가정의 '불화'로만 해석하기에는, 그 이면에 도사린 시대적 장벽이 너무나도 높았습니다. 그것은 19세기 프랑스 사회가 여성을 가두었던 '보이지 않는 벽'입니다.


마리의 작품이 주로 실내(Intérieur)나 정원, 가족의 초상화에 집중된 것은 그녀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여성 화가들은 남성들처럼 카페나 밤거리를 혼자 다니며 도시의 역동적인 모습을 관찰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그녀는 오직 창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을 포착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지켜내려 노력했습니다.


마리 브라크몽은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사트와 함께 인상주의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인물입니다. 비록 사회적 제약과 가정 내 불화로 활동을 중단했지만,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 오르세 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 전시되어 당대 여성 예술가의 독창적인 시선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기록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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