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에서 인상주의 거장으로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복도를 거닐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모네나 르누아르의 화려한 색채 사이로 유독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시선'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만나게 됩니다. 남성 화가들이 주류를 이루던 19세기 인상주의 화단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합류하여 자신만의 독보적인 빛을 냈던 이름, 바로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입니다.
그녀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심장부에서 당당히 활동한 거장이자,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와 같은 동료들과 함께 화단을 빛낸 소수의 여성 화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녀가 왜 '금수저'라는 안락한 미래를 뒤로하고 파리의 차가운 화실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남긴 예술적 유산이 현대의 우리에게 어떤 전략적 통찰을 주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 합니다.
메리 카사트의 이야기는 184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유복한 저택에서 시작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유서 깊은 은행가 가문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성공적인 주식 중개인(Stockbroker)이자 토지 투자자로 막대한 부를 일군 자산가였습니다. 가문이 누렸던 풍요한 자산은 그녀를 평생 사교계의 주인공으로 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15세의 어린 메리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머물 곳은 필라델피아의 대저택이 아닌, 예술의 심장부인 파리라는 사실을요.
당시 미국 미술계는 매우 보수적이었고, 여성에게 주어진 교육의 기회는 고작 가정을 우아하게 꾸미기 위한 장식적인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가족의 완강한 반대와 사회적 시선을 뒤로하고 그녀는 1866년, 홀로 파리행 배에 오릅니다. 이것은 단순한 유학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독립 선언이었습니다. 그녀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스스로를 단련했고, 차별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앞에서 오히려 붓 끝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습니다.
여성이 예술가로서 인정받기 위해선 두 배의 노력이 아니라,
두 배의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파리의 공식 살롱전(Le Salon, 르 살롱)에서 잇따른 낙방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1877년경, 운명처럼 한 남자가 손을 내밉니다. 바로 인상주의의 까칠한 완벽주의자, 에드가 드가(Edgar Degas)였습니다. 드가는 카사트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 당시 여성 화가들에게 가해지던 편견을 뒤엎는 유명한 찬사를 남깁니다.
대부분의 여성은 모자를 장식하듯 그림을 그리지만, 당신은 다르군요
Most women paint as though they are trimming hats. Not you
이 한마디는 두 천재의 예술적 동반자 관계의 서막이었습니다. 10살의 나이 차이와 타협을 모르는 드가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서로를 지탱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루브르를 거닐며 동판화 기법을 연구하고, 서로의 모델이 되어주며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카사트는 훗날 "드가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 내 인생이 바뀌었다"라고 고백할 만큼, 이 만남은 그녀의 예술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메리 카사트의 예술적 정점은 '여성과 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폭발합니다. 당시 남성 화가들이 여성을 관음적인 시선으로 그리거나 신화 속 여신처럼 이상화할 때, 카사트는 여성을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 묘사했습니다. 특히 1890년 파리에서 열린 일본 판화 전시회는 그녀에게 거대한 혁신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녀는 일본 미술의 과감한 구도와 평면적인 색채 패턴(Japonisme, 자포니즘)을 자신의 화풍에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893년 작 <아이 목욕(The Child's Bath)>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독특한 부감 시점, 정교한 무늬의 카페트, 그리고 아이를 씻기는 어머니의 투박하지만 단단한 손길. 그녀는 종교화 속 성모상의 박제된 숭고함이 아닌, 현대 여성이 경험하는 '진짜 모성'의 가치를 캔버스에 담아냈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 속에 인생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카사트의 예술적 여정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마스터피스들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 그녀의 세계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그 흐름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먼저 1868년 파리 살롱 데뷔작인 <만돌린 연주자(The Mandolin Player)>는 전통적인 화법을 따르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그녀만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린 신호탄이었습니다. 이후 1878년 작 <극장 상자 속(In the Loge)> 에서는 여성을 관찰의 '대상'이 아닌 세상을 관찰하는 '주체'로 당당하게 묘사하며 기존 화단의 문법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특히 1880년경 제작된 <정원에서 코바늘 뜨개를 하는 리디아(Lydia Crocheting in the Garden at Marly)>는 화가의 동생을 모델로 정적인 일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수작입니다. 흔히 뜨개질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정교한 '코바늘 뜨개(Crocheting)'를 하는 모습으로, 여성의 일상을 한층 더 세밀하고 전문적인 시선으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인생 역작인 <아이 목욕>을 거쳐, 1894년의 <보트 파티(The Boating Party)>에 이르러서는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그녀가 인상주의를 넘어 얼마나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거장이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줍니다.
메리 카사트를 단순히 '그림 잘 그리는 화가'로만 평가하는 것은 그녀의 가치를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술적 성취를 넘어, 프랑스 인상주의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이를 전 세계로 확산시킨 최고의 '암바사드(Ambassadrice, 여성 사절)'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였던 루이진 해브마이어(Louisine Havemeyer)와 같은 미국의 대부호 수집가들에게 모네, 드가, 세잔의 작품을 구매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인상주의는 '미완성된 괴상한 그림'에 불과했지만, 카사트는 이 새로운 예술이 가질 미래 가치(La Vision, 라 비죵)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조력 덕분에 배고픈 천재였던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훗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이 세계 최고 수준의 인상주의 컬렉션을 보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예술의 혼과 자본의 흐름을 연결한 진정한 문화 가교였던 셈입니다.
더불어 그녀는 말년에 여성 참정권 운동(Suffrage movement)을 지지하며 사회적 행동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습니다. 부유한 배경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사회와 공유하려 했던 그녀의 행보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이었습니다.
메리 카사트의 삶은 안정된 안주와 불확실한 도전 사이의 선택을 시사합니다. 그녀가 대서양을 건너 파리의 화실에서 감내한 고독은 결국 '미국 미술의 어머니'라는 역사적 평가로 귀결되었습니다. 안온한 배경을 뒤로하고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던진 그녀의 궤적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