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19세기 파리의 유리천장을 뚫고 인상주의의 심장이 된 여인

by M plus Paris

파리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의 5층, 인상주의 전시회장을 걷다 보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화사하고 투명한 빛의 그림을 마주하게 됩니다. 모네의 거친 파도나 르누아르의 화려한 드레스 사이에서, 마치 신선한 공기 한 모금을 들이켠 듯한 청량감을 주는 작품들. 바로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녀를 인상주의의 핵심 인물로 기억하지만, 19세기 파리에서 여성으로 예술가라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오늘은 단순한 화가 이상의 삶을 살았던, 현대 여성 예술가의 원형이자 전략적 삶의 예술가였던 모리조의 이야기를 정교한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Berthe Morisot, 19th-century photograph, Wikimedia Commons



19세기 살롱이 거부한 여성, 테라스와 정원에서 인상주의의 꽃을 피우다


이야기는 19세기 파리 예술계의 높은 문턱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살롱(Salon, 프랑스어로 거실을 뜻하나 당시 미술가들의 등용문이었던 공식 전시회를 일컫는 용어)'은 여성들에게 지극히 폐쇄적이었습니다.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조차 여성의 입학을 금지했기에, 모리조 세대에게 공식적인 교육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죠.


Berthe Morisot, "Le jardin à Bougival" (1884), Musée Marmottan Monet, Paris


많은 이들이 모리조가 실내 정경을 주로 그린 것을 두고 단순히 여성의 외부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법적인 금지보다는 사회적 시선이 더 큰 벽이었죠. 당시 여성이 보호자 없이 거리에서 스케치를 하는 것은 '부적절한(inconvenant)' 행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모리조는 이 제약을 피하는 대신, 자신이 머물 수 있는 테라스와 정원, 거실을 자신만의 '아틀리에(Atelier, 작업실)'로 재정의했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빛을 안으로 들여오겠다는 그녀의 사고는, 일상의 사소한 공간을 빛과 공기가 살아 숨 쉬는 예술의 장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에드마의 선택과 베르트의 투쟁: 여성 예술가에게 결혼이란 무엇이었나



사실 베르트에게는 자신만큼이나 재능이 뛰어났던 언니 에드마(Edma Morisot)가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함께 그림을 배우며 서로의 뮤즈가 되어주었죠. 하지만 19세기 중산층 여성에게 결혼은 흔히 예술적 경력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에드마가 결혼과 함께 전업 화가의 길을 사실상 포기하고 가족에 헌신하는 삶을 택했을 때, 베르트가 느낀 상실감은 단순한 슬픔 이상이었습니다.



Berthe Morisot, "The Sisters" (1869),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에드마는 이후 베르트의 작품 속에 모델로 자주 등장하며 그녀의 예술 세계에 흔적을 남겼지만, 창작자로서의 주도권은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언니의 이러한 변화를 목도한 베르트는 결심합니다. 자신은 결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에만 매몰되지 않겠노라고 말이죠. 그녀에게 예술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독립을 향한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성(姓)을 지키고 붓을 잡다: 모리조가 지켜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베르트 모리조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거장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동생인 외젠 마네(Eugène Manet)와의 결혼입니다. 당시 기혼 여성은 법적으로 남편의 귀속물처럼 취급받기도 했지만, 모리조는 결혼 후에도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 Musée Marmottan Monet, Paris / The Bridgeman Art Library / Service presse / DR



후대 연구자들은 그녀가 결혼을 결심할 때, 작품 활동의 지속과 자신의 성 유지를 사실상의 전제로 삼았을 것이라 추론합니다. 오늘날의 '혼전 계약서'처럼 명시적인 문서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녀가 보여준 일관된 행보는 그 어떤 법적 조항보다 견고한 예술가적 자부심의 발현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 뒤에 숨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당대 최고의 거장들과 당당히 경쟁했습니다.



명작 '요람(Le Berceau)'에 숨겨진 모성애 그 이상의 내적 갈등



모리조의 명작 '요람(Le Berceau, 아기 침대)'은 언니 에드마와 그녀의 딸 블랑슈를 모델로 한 작품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모성애의 전형으로 읽지만,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어머니의 시선에서 묘한 긴장감을 발견해 내기도 합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에드마의 표정에는 모성의 기쁨뿐만 아니라, 육아라는 거대한 책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불안과 갈등이 암시되어 있다는 해석입니다. 모리조는 모성(Maternité)을 마냥 달콤하게 미화하기보다, 한 인간으로서 여성이 겪는 복합적인 심리를 사실적으로 포착했습니다. 얇은 커튼 너머로 비치는 빛은 우아하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침묵은 19세기 여성들의 내밀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Berthe Morisot, The Cradle, 1872, Musée d'Orsay, Paris.



에두아르 마네의 화풍을 바꾼 여인: 뮤즈를 넘어선 영감의 파트너



우리는 흔히 에두아르 마네를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부르지만, 정작 마네를 밝은 빛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모리조였습니다. 마네의 초기작들이 무겁고 어두운 색조를 띠었던 것에 반해, 모리조와 교류하며 그녀를 모델로 그린 시기부터 그의 팔레트는 눈에 띄게 밝아졌습니다.



Berthe Morisot (left) and Édouard Manet (right), 19th-century studio photographs


Edouard Manet,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Musée d'Orsay, Paris.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력한 예술적 자극제였습니다. 모리조는 마네와 긴밀하게 대화하며 야외 광선(Plein air, 실외에서 그리는 기법)의 중요성을 공유했고, 이는 마네의 화풍이 인상주의적으로 변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네는 그녀를 '제비꽃 여인'으로 남겼지만, 모리조는 단순한 모델을 넘어 마네의 예술적 방향성을 제시한 대등한 동료이자 파트너였습니다.



마네 가문의 복잡한 사정과 전략적 '가족 되기'의 배경



당시 마네 가문은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아내 쉬잔, 그리고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아들 레옹을 둘러싼 복잡한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레옹의 아버지가 에두아르 마네 본인인지, 혹은 그의 아버지인지에 대한 논란이 가문 내에 흐르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는 에두아르 마네가 자신의 소중한 예술적 동반자이자 깊은 신뢰 관계를 맺고 있던 모리조를 곁에 두기 위해, 동생 외젠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모리조 역시 마네 가문의 일원이 됨으로써 당대 최고의 예술적 자산과 연결되는 동시에, 사회적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를 얻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동반자, 아내의 천재성을 지지한 헌신적인 파트너




모리조의 남편 외젠 마네는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현대적인 '동반자적'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전시회를 직접 기획하고 작품을 운송하며, 오늘날의 매니저나 코디네이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Berthe Morisot, her husband Eugène Manet and their daughter, Julie


외젠은 화가로서 자신의 야심을 앞세우기보다, 아내의 천재성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가사와 육아를 지원하며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었습니다. 모리조가 딸 쥘리를 키우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경력을 존중했던 외젠의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이는 세련된 삶의 태도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서로의 성장을 돕는 성숙한 관계에서 나옴을 시사합니다.




모네와 피사로 사이에서 6번의 전시를 지켜낸 강인한 기록




인상주의 그룹의 태동부터 소멸까지, 모리조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열린 총 8번의 인상주의 전시 중, 출산 직후였던 시기 등을 제외한 총 6번의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모네나 피사로 같은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록이자, 그녀가 인상주의의 '정통성'을 지키는 핵심 기둥이었음을 증명합니다.


남성 중심의 화단에서 그녀의 거친 붓질은 때로 '여성적인 연약함'이라 조롱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화풍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캔버스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인상주의적 가치는 그 누구보다 견고했습니다.


Berthe Morisot, Woman at Her Toilette
Berthe Morisot, Woman with a Fan (Femme à l'éventail), 1875, Musée Marmottan Monet, Paris.
Berthe Morisot, After Luncheon (Après le déjeuner), 1881
Berthe Morisot, Hanging out the Washing (Blanchisseuses étendant du linge), 1875
Berthe Morisot, In the Dining Room (Dans la salle à manger), 1886



미완성의 미학: 왜 현대 미술은 그녀를 '가장 현대적인 인상주의자'라 부르는가



모리조의 작품을 보면 캔버스의 여백이 그대로 드러나거나 거친 붓 터치가 강조되어 '미완성'인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당시 평론가들은 이를 비판했지만, 오늘날 미술사에서는 이를 대상의 본질과 속도감을 포착하려는 가장 앞선 시도로 평가합니다.


그녀의 붓끝에서 형태는 해체되고 빛과 감각만이 남습니다. 이러한 '미완성의 미학'은 훗날 표현주의와 현대 추상 미술의 감각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녀는 이미 150년 전에 현대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예견했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던 셈입니다.



Morisot’s home extension featuring Manet’s portr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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