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1. 준비된 기상
느긋하게 보내러 온 여행이기에 일정에 구애 받지 않지만 하루에 몇 번 없는 버스를 타야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체스키 크롬로프로 향하는 8시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10시기에 이른 아침의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부랴부랴 컵라면에 물을 붓고, 포크로 휘어 감고 김치와 하이파이브한 후 길을 나선다.
한국에서 라면을 얼마나 자주 먹었던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안 먹었다. 수험기간 뭐 하나라도 부대낄까 밀가루를 끊으면서 올 상반기는 아예 안먹었었고, 시험이 끝난 후에도 베아트리체의 내조 덕에 라면을 별로 먹을 일이 없었다. 심지어 6개월이나 되는 라면의 유통기한이 지나는 일도 발생할 정도로. 물론 버리지는 않았다.
3일째 아침을 라면으로 해결하며 드는 단상. 워낙 무딘 성격 탓에 맛만 있다면 사실 같은 반찬으로 일주일을 먹어도 아무 불만 없다. 얼마전 베아트리체는 한 달 동안 회만 먹고도 살 수 있다고 하였고 - 그렇게 먹어대다간 노로 바이러스가 가만두지 않을텐데 - 나는 제육볶음이라 하였다. 물론 비빔밥도 삽 가능.
문득 학생회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오던 제육볶음과 수제돈까스 생각이 난다. 2,500원에 잘도 먹었드랬다. 돈까스가 주 메뉴인데 돈까스를 더 달라던 친구도 있었지. 의식의 흐름이 이렇게 무섭다.
이래저래 잘 챙겨먹고, 서울에서 먹던 체코산 삼겹살을 굽고, 많이 마시고 있지만 역시 고향의 맛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돌아가면 베아트리체에게 체코산 삼겹살에 된장찌개 찐하게 끓여달라고 해야지. 청양고추랑 깻잎은 상비약처럼 챙겨줄테니.
아 물론 건강을 생각해서 소주도.
2. 체스키 크롬로프
프라하 근교투어 중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동네.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다는 후기들이 많았던 지라 - 물론 지금까지도 체코에서 동화를 충분히 많이 봐왔다만 -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 이동하여 도착. 누누히 느끼지만 서울에서 이 정도 이동 시간이면 평양까지도 갔겠지.
발 닿는 곳마다 그저 예쁘다는 감탄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코로나 전에 작성된 블로그들을 보면 한국인 반, 중국인 반이었다는데 관광객이 나 밖에 없는 듯. 코로나가 전세계적으로 피곤하게 한다.
아기자기한 골목들을 지나다 보니 어느덧 도착한 광장. 올로모우츠와 마찬가지로 17세기 페스트를 물리친 기념으로 성 삼위일체 탑을 쌓았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이 주는 보이지 않는 공포는 여전한 것 같다.
걷다가 지쳐 오늘은 또 무얼 맥주에 먹어야 하나 고민 끝에 현지인들이 여럿 들어가는 것 같은 식당으로 따라 들어가 보았다.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는 덩치 좋은 직원이 점심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파스타냐, 스테이크냐 고르란다. Do or die. 뭐든 상관 없으나 밥을 준다는 말에 스테이크를 달라고 했다.
아마 자세한 설명을 내가 못알아들어서 그랬는지 저렇게 나오는 건 줄은 몰랐는데. 쌀이 좀 설익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컴플레인 걸 수도 없거니와 원래 여기서는 이렇게 먹을 수도 있으니 참기로. 왜냐면 필스너, 코젤이 아닌 로컬 비어라고 자랑한 생맥주가 너무나도 맛있었기 때문이다. 정황상 미국 버드와이저의 효시가 된 버드와이저 부드바리인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물론 프라하에서도 못 보던 생맥주이니, 체스키 오길 잘했다.
보통 성벽을 두르는 해자에는 물이 흐르게 하여 방어 역할을 하는데, 체스키성 해자에는 특이하게도 곰이 살고 있다. 저런 정신 상태로는 방어 역할을 못했을 것 같은데. 어쨌든 곰을 얼마나 풀어놨길래 방어를 할 수 있던건지. 알다가도 모를 동네다.
성벽을 지나 대충 전시된 전시관을 대충 보고 지나면 체스키 투어의 정점, 성탑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일주일 남짓 프라하에서 머물며 많은 풍광을 느껴왔지만 이 전망대에서 보는 뷰는 정말 장관이었다. 옛날 영주들은 이렇게 위에서 시민들을 속속들이 내려다 보았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끼 같네.
프라하의 11월은 우기라 제대로 된 햇살을 즐길 수 없던 바, 오랜만의 맑은 하늘에 함초롬한 햇살을 함뿍 받고 체스키를 떠난다.
3. 탈 혼술
생코젤, 생필스너가 아무리 맛있을지언정, 일주일을 점심, 저녁으로 - 때때론 아침에도 - 마셔대니 헛헛함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까페에서 동행을 구하는 글들을 보니 혼자 온 여자에게 말 걸기는 그렇고, 혼자 온 남자에게 말 걸기는 피차 쉽지 않아
고심을 거듭하며 눈팅만 하다가 여럿이 모이는 것 같아 껴달라고 요청하였고 흔쾌히 만남이 성사되었다. 카카오톡 프사의 건장한 남성을 보고 설레이는 것은 왜일까!
까를교탑 앞에서 만나 그 친구의 다른 일행이 합류 되고 추가적으로 올 손님도 있다하니 We are the world.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서 꼴레뇨를 외쳤다.
구글맵에서도 평점이 후한 Pork’s를 찾아 꼴레뇨와 생코젤. 나즈드라비. 족발을 야들야들하게 삶아서 겉을 구워낸 음식인데 겉바속촉의 끝판왕이다. 프라하에서 먹은 그 어떤 음식보다 - 체코산 삼겹살 제외 - 맛있어서 감탄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은 일정동안 또 가야지.
물론 꼴레뇨와 생코젤의 마리아쥬를 완성시켰던 것은 좋은 친구들과의 대화였다. 동갑인 친구는 이래저래 일을 하다가 그만 두고 유튜버로 전업해서 여행 유튜브를 찍고 있다고 했다.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서 쏟아지는 별들도 보고, 독일에서는 깨끗하게 벗고 들어가는 남녀혼탕도 들어가고, 어제는 프라하 한인민박집 술을 다 없애버렸다는 - 진작 만날 것을! - 얘기를 들으며 하하호호. 물론 구독도 눌러줬다.
세 살 밑인 동생은 회사가 공장이전으로 유급휴가를 받은 지라 한 달 간 서유럽을 돌고 돌아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했다. 비행기를 놓쳐서 로마를 못 가고 베를린을 가고, 기차를 타고 프라하에 도착하여 혼맥하다가 지쳐 일행을 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극공감.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이렇듯 초면인 사람들과도 여행이라는 공통의 매개를 중심으로 인생이라는 여행을 쉽게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쁨을 준다. 물론 거자정리 회자필반이라 주고 받은 웃음도, 연락처도 내일이면 잊혀지겠지만.
맥주를 세 잔 쯤 먹고 있자 뒤늦게 합류하겠다던 일행이 합류하였고, 다른 일행 한 명이 재즈바를 같이 가겠다고 기다리고 있대서 어느덧 총 인원은 다섯 명. 도부리 댄.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지난 주에 혼자 방문했던, 베아트리체의 추천 재즈바 아그라타로 향했다. 마스크도 안 쓴 사장이 백신 접종 여부 증명서를 대충 체크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증명서를 식당에 두고 온 것 같단다. 여차저차 양해를 구했지만 안된단다. 당신 마스크나 좀 쓸 것이지.
한 시간 정도의 재즈공연 관람을 마치고 나자 어느덧 자정 무렵. 생각해보니 프라하에서 밤늦게 돌아다닌 적이 별로 없어서 술집들이 일찍 닫는지도 몰랐다. 물론 자정이면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간신히 문 연 펍을 찾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남은 얘기들을 주고 받는다. 그제쯤 만나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모두가 즐거운 여행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