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을 즐기는 2월
2월에는 총 16편을 관람했다.
본 작품 수에 비해 코멘트 남길 만한 작품은 많이 없는 느낌이긴 한데, 그래도 돌이켜보니 잔잔하게(?) 괜찮은 작품들을 몇 편 보았던 것 같다.
너는 나를 불태워 (마티야스 피네이로, 2024)
체사레 파베세의 소설 <레우코와의 대화> 중 「바다의 거품」을 각색한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 제목부터 소재까지 생소한 단어 투성이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영화는 명확한 플롯이 거의 없다.
짧은 텍스트 조각과 연관이 희미한 이미지들이 병렬로 이어지는데, 바로 그 불일치 덕분에 묘한 신선함이 있다. 평소엔 이런 ‘이야기 없는 영화’를 썩 좋아하지 않지만(호불호가 확실할 영화다), 인내심 테스트하듯 끝까지 보았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독서든 영화든 ‘효율’ 중심의 소비에 익숙하다 보니 느릿하게 감상하는 법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지루한’ 작품을 볼 때는 한 편의 수행처럼 임한다.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묘하게 마음이 고요해지고, ‘아, 세상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마인드 (켈리 라이카트, 2025)
작년 부국제에서 상영했었고, 아직 국내에서 정식 개봉은 하지 않은 작품이다. 이름을 들어봤던 영화고 <챌린저스> 남주였던 조쉬 오코너도 익숙하기도 해서 관람.
배경은 베트남전 시기로, 미술품 절도를 둘러싼 한 남자의 하이스트 무비다. 하지만 계획과 실행 모두 어설퍼서 도리어 코미디에 가깝다. 재즈 음악 덕분인지 그 허술함이 더 도드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우디 앨런의 초기작들이 떠올라서 나름 재밌게 봤다.
매직 팜 (아말리아 울만, 2025)
남미의 한 음악가를 취재하려던 허술한 제작진이 조사 부족으로 엉뚱하게 아르헨티나로 향한다. 그곳에서 현지인들과 협력해 무언가 ‘바이럴 콘텐츠’라도 만들어보려는 과정을 그린 가벼운 풍자극이다.
나이는 좀 있지만 꽤나 좀 힙한(?!) 클로이 세비니가 나오는 영화라 호기심에 관람했다. 감독은 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하는 아말리아 울만이라는 꽤 젊은 감독인데, 편집이나 영상이 독특한 것이, 보법이 좀 남다르다. (이런 콘텐츠를 볼 때마다 좀 신기한데, 도대체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뭘 보고 살아서 이렇게 독창적인 걸 또 뽑아내는 걸까 싶다. 뭐 물론, 분명 어딘가에 레퍼런스가 있겠지만?)
영화도 한 시간 반 정도로 짧고 그냥 가볍게 보기 괜찮았다.
폭풍의 언덕 (에메랄드 페넬, 2026)
이번 달에는 마고 로비에 꽂혀서 <바비>와 지난달 개봉한 <폭풍의 언덕>을 보았다. 원래 목표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끝내는 것이었는데... 결국 못 끝내고 영화 먼저 관람. (분명 학창 시절에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안 난다. 지금 읽고 있는데 완전 처음 읽는 기분.)
두 주연의 격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러브스토리인데, 약간 개츠비 느낌도 나고 그렇다. 사실 소설도 그렇게 순한 맛의 사랑은 아닌데, 이 영화가 <폭풍의 언덕>의 여러 버전 중 가장 파격적이고 거칠게 연출이 돼서 불호가 좀 많은 게 아닌가 싶기도. (반면 이동진은 상당히 호평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바비>도 그렇지만, <폭풍의 언덕>도 뭐 거의 마고 로비를 위한 영화 느낌이다. 캐시가 결혼하고 온갖 드레스와 화려한 헤어/메이크업으로 일상을 즐기는 모습은 뭐... 그냥 화보집 그 자체. 그녀를 보는 재미가 있다.
로슈포르의 숙녀들 (자끄 드미, 1967)
보고 싶은 리스트에 오랫동안 찜해놨지만 이제야 보게 된 영화 (사실 너무 볼만한 다른 영화가 없어서 그냥 생각 없이 틀었다). 프랑스 소도시 로슈포르에 사는 쌍둥이 자매 델핀과 솔랑쥬는 무용과 피아노를 가르치며 언젠가 이곳을 떠나 사랑과 예술의 꿈을 펼치길 바란다. 어느 날 유랑 공연단과 미국인 작곡가, 그리고 각자의 인연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들이 이 도시에 모여들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이다.
뮤지컬 형식의 영화인데, 보는 내내 묘하게 <라라랜드>가 생각나서 찾아보니 정말로 그 감독 데이미언 셔젤이 이 영화를 비롯하여 자끄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라라랜드> 보다는 분위기가 좀 더 밝은 톤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더 화려하고 보는 재미가 있었다. 중간중간 안무도 더 멋있는 느낌이랄까. 뭐 원래 개인적으로 <라라랜드>를 썩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센티멘탈 밸류 (요아킴 트리에, 2025)
아, 2월에 본 영화 중 최고였다. <햄넷>에 세게 당해서(?) 약간 오스카 후보 + 잔잔 포스터 분위기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영화 도입부부터 '아, 이 영화는 다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를 했달까.
사실 영화 내용 자체는 흔하다. 자식(딸)과의 틀어진 관계를 뒤늦게나마 바로잡아보고자 노력하는 아버지를 그린 영화. 최근에 <제이 레노>도 있었고, <토니 에드만>도 있다. 이 영화는 일단 '집'의 관점에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도 신선했고, 북유럽 특유의 미니멀한 분위기, 그리고 장르를 넘나들며 사용된 음악, 그래 특히 음악이 너무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러웠고.
결말이 너무 급 마무리된 것이 아니냐는 일부 시선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오히려 결말이 질질 끌지 않고 딱 적당하게 끝난 것 같아 좋았다. (사실 러닝타임이 애초에 짧지 않기에... 더 늘어지는 걸 원치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