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조각
딱히 해외여행을 즐기는 편이 아닌 내가, 올해 소진될 마일리지를 사용하기 위해 추석 연휴에 무려 8박 9일을 교토에서만(!) 보내기로 하고 무작정 교토로 떠났다. 사실 가기 전에 교토에서 9일을 지내는 게 너무 심심하거나 지루하진 않을지 살짝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결국은 쓸데없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교토에 완전 반해버렸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유명하다는 교토 단풍을 보겠다는 핑계로 바로 또 교토행 비행기를 표를 끊었다.
이번 교토 단풍 여행은 3박 4일, 나름 빠듯한(?!) 일정이기 때문에 정말 심혈을 기울여 계획했고, 파워 P인데도 불구하고 진짜 수십 번은 일정을 수정한 것 같다. 지난 8박 9일 일정을 대부분 내 본성 P 그대로 다녔다가 돌아와서 내가 안 가본 곳들이 이렇게나 많았다고...?! 하며 후회를 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정말 완벽에 가깝게 계획하고 싶은 욕심이 너무나도 컸기에. (지난번 여행에서 예상치 못한 컨디션 난조나 여러 돌발상황으로 계획이 다 지켜지지도 못할 것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에 이번 여행계획은 최대한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세우는데 아주 두 달간 아주 공들였다... 내 나름...)
그중 맨 처음 일정이었던 교세라 시립미술관(Kyoto City KYOCERA Museum of Art)의 MUCA전. MUCA는 독일의 urban and contemporary art 미술관인데 마침 이 시기에 뱅크시와 카우스를 포함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의 최초 교토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사실 조각이나 설치미술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라 (아무리 뱅크시와 카우스라지만... 카우스 작품은 국내 프리즈에서도 몇 번 보았고) 솔직히 막 엄청 큰 기대가 되거나 하진 않았는데, 뭐 유명한 작가들 작품이 온다니, 그것도 교토 시립미술관에, 꼭 가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무조건 일정에 넣었다. 매우 바쁠 예정인(!) 나의 일정에 막판에 겨우 끼워 넣은 일정이었다.
이 날 연착도 없이 아주 이른 비행기로 교토에 9시 좀 넘어 도착하고, 우리 비행기를 탑승했던 사람들밖엔 입국수속 하는 사람들도 없어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입국수속에 하루카 티켓까지 발권 완료해서 웬일, 이거 교토에 아주 일찍 도착하겠구만!! 하고 엄청 설렜는데... 하루카가 교토로 가는 도중에 두어 번 정차하더니 결국 1시간 가량이 지체되었다... 여기서부터 도착하자마자 라멘을 먹으려던 일정이 꼬이고 바로 숙소에 짐 놓고 미술관으로 이동하기로 결정. 미술관까지 거리는 좀 있었고, 하루카 정차로 짜증에 숙소 찾느라 헤맸고 밥도 못 먹은 상태라 매우 지친 상태였으나 일단 교토의 거리를 눈에 담고 싶어서 걸어서 미술관으로 갔다.
결론은, 아 역시나 이 전시를 일정에 넣기를 매우 잘했다. 실물로 접한 뱅크시 작품은 정말 너무, 너무 좋았다. (이건 올해 국제갤러리에서 했던 아니쉬 카푸어 전을 갈까 말까 고민했을 때처럼 '역시 직접 본 게 잘했다!'라고 생각이 든 결정이었다.) 작품들의 스케일도 생각보다 훨씬 컸고, 각 작품 뒤의 철학과 아이디어도 좋고, 보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확실히 이런 스케일이 큰 작품들은 실물로 접해야 그 압도적인 느낌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것 같다. 사실 뱅크시는 너무 유명하니까 여러 매체 통해서 많이 들어보기는 했어도 그의 작품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는데, 이번 계기로 좀 더 알게 되었으니 매우 만족스러웠던 일정.
역시 뭔가를 할까 말까 고민이 될 땐 가급적 해보는 쪽을 택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이게 (좀 뒤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올해 내 깨달음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