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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3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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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Hee Dec 17. 2023

야마자키 위스키 증류소

아, 대망의 하쿠슈 25년, 야마자키 25년, 그리고 히비키 30년!

고된(?) 첫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발 뒤꿈치를 보니... 까맣게 안쪽에서 피가 터진 건지 멍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작은 상해가 생겼다. (지난 추석 연휴 교토에서 9일 내내 신어도 정말 편했던 운동화였는데, 그때보다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발이 좀 춥고? 아팠다. 확실히 운동화도 계절에 따라 다르게 신어야겠다,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너무 힘들었고 오른쪽 어깨가 유독 아팠는데 (이런 불편함은 또 생전 처음이었다), 그래도 또 나름 정해놓은 일정이 있었고 (나중에 정해놓은 일정을 못 마친 걸 후회하지 않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라시야마로 출발했다.


지난번 교토에 왔을 때는 저녁 즈음에 와서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지만 이른 아침 이 청량한 광경은 매우 신선했다. 속이 시원해지는 풍경-

아라시야마 도게츠교
오전 9시 즈음의 아라시야마
단풍이 들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라시야마의 단풍 절정은 어떤 모습이지?
푸릇푸릇했던 지난 아라시야마와는 다른 풍경-

그리고 저번에 방문하지 못했던 텐류지를 보러 급히 이동했다. (이날 오전에 메인 이벤트가 예약되어 있기에 아라시야마에서는 서둘러서 둘러봐야 했다...ㅠ) 시간 관계상 입장해서 찬찬히 구경까지는 못하고, 텐류지 안으로 들어가는 그 입구 길가만 구경했는데, 여기만 해도 단풍이 너무 예뻤고 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곳곳에 새빨간 단풍들. 자연의 색이란-
하... 너무 예쁘다... 정원에 이런 나무가 있다면 얼마나 이쁠까..

그리고 시간 관계상 겉핥기식으로 입구 쪽만 찍고 돌아온 치쿠린. (나 여기 와봤다, 정도의 인증? 하지만 감이 왔다…어차피 그리 내 취향은 아닐 것이라는게.)

대나무 숲은 늘 푸릇한 거죠?

그리고 드디어 이날의 메인 이벤트인 야마자키 증류소 투어를 위해 바로 야마자키 역으로 이동. 오전 11:20에 시작이어서 서둘러야 했다(위스키를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마셔야 한다는 게 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야마자키로 가는 열차에서 오전에 "나름 셀카 좀 몇 장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남겼던 사진들을 찬찬히 보았다. 야외에서는 햇빛이 너무 강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열차 안에서 보니 오전에 이동하면서 허겁지겁 먹은 편의점 팬케이크빵(나름 내 최애 편의점 빵이다...)의 메이플 시럽이 묻은 입가와 어제의 체력 소모 여파로 인한 부은 눈과 얼굴(!!)에 화들짝 놀라 삭제해 버렸다... 아무리 나만 본다 한들... 내 사진첩에 있는 것조차 싫었던 그 사진들... 그

처참함에 깜짝 놀라 바로 삭제행...


이번 교토 오기 전 가장 기대했던 일정 중 하나, 바로 야마자키 증류소의 유료투어다. 지난번 추석 때는 이 증류소가 리뉴얼 중이어서 아쉽게도 방문을 못했는데, 11월부터 재오픈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꼭 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다짐만 가지고는 부족한 것이, 유료투어는 이제 추첨제로 바뀌어서 "당첨"이 되어야 참가가 가능하고, 선착순 무료투어도 아주 순식간에 마감이 되어 버린다. 나는 유료투어 두 가지(3만엔짜리 일반투어와 10만엔짜리 프리미엄 투어가 있다)를 여러 일정 신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처참하게 탈락했었기에 선착순 무료투어를 예약 오픈 날 수십 분 대기해 겨우 예약해 두었었다.그런데 여행 며칠 전 예상치 못하게 유료투어 취소표 예약이 가능하다길래 취소분 예약 오픈 날 접속 했더니 내 일정 중 일반투어 취소분 딱 한자리가 남아있는 게 아닌가!! 아주 운 좋게 바로 예약했다.


아라시야마에서 교토역을 다시 지나 어느덧 한적한 야마자키 역에 도착. 10분 좀 넘게 걸어가니 야마자키 증류소가 보인다.

두근두근... 드디어 입장하는구나
메인 입구

들어가서 예약자명을 확인하고, 100주년 기념 뱃지도 받고, 투어 가이드 어플을 다운 받고 모든 준비를 마친다.

투어 시작 대기 중 구경하면서
영롱한 위스키들

그리고 투어가 시작되었다. 일단 투어에 앞서 야마자키의 역사에 대해서 듣는데, "일본인들의 섬세한 입맛에 맞는"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야마자키가 탄생했다고 한다. 사실 올해 초에 너무 심심해서 위스키나 좀 마셔볼까, 하는 마음에 무작정 어느 바에 가서 16가지 위스키를 시음해 본 적이 있는데(참고로 난 알쓰이고... 이 날 결국 토를 세 번이나 했다...), 이 중에는 코로나 시국에 유독 인기가 치솟은 야마자키, 히비키 같은 재패니즈 위스키와 발베니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입맛을 확 끌었던 (타격감이 강한) 피트나 버번보다는 밍밍한 느낌이길래, "흠. 재패니즈 위스키랑 발베니는 딱히 내 취향은 아니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 설명을 듣고 나니, 아 "섬세한" 입맛에 맞춤화된 위스키여서 내가 그렇게 느꼈나 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아래는 투어의 일부분들. (사진이 너무 많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들 위주로 추려보았다.)


Fermentation(발효) 과정. 발효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washback과 우드 washback, 이 두 가지가 사용된다고 한다. (참고로 투어 중 들었던 어플 가이드는 투어 이후로는 다시 재생할 수 없다고 하여 삭제하였고, 이건 내 기억에 의존한 설명이다) 대충 기억을 떠올려보면, 스테인리스 스틸은 일정한 맛을 내는 경우에 사용하고, 우드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고 다채로운 맛을 내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이 차이가 향에서 느껴졌는데, 우드 washback이 있는 곳에 가면 향이 정말... 그 설명 그대로 다채롭고, 풍부하고, 그냥 내 주변 공기가 위스키 그 자체였다. (그래서 아마 투어 중 취한 것 같거나(?) 어지러우면 가이드에게 꼭 말하라고 했던 것 같다.) 이곳 사진을 찍으면서 "아 사진에는 향이 담을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라는 생각을 처음 해본 것 같다. 사진의 한계.


이 향이 향수로 존재한다면 당장 구매할 텐데... 잠깐 다른 얘기이지만, 비록 난 알쓰지만 술을 싫어하지는 않고 위스키 향도 매우 좋아해서, 예전에 프레데릭말에 위스키향 나는 향수가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시향 했던 적이 있다. 그 향수가 정말 위스키 향을 근접하게 내서 "오 진짜 위스키 향이 나네? 너무 좋다"라고 생각했었는데(그런데 이상하게도 최근에 프레데릭말 매장들을 갔을 때는 그 향이 사라진 건지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무슈가 아니라 무슨 무슈였던 거 같은데), 이 우드 washback에서 나는 위스키 향은 극락 그 자체였다.

stainless steel washback
wooden washback

그리고 이제 저장고. 이곳은 온도 조절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이 저장고의 온도로 숙성을 시킨다고 한다. 4계절 자연 그대로의 온도로.

오른쪽이 더 오래 숙성된 것. 더 숙성될수록 높이가 올라간다고. 색도 변한다.
하- 좋다 이곳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그냥 멋있다.
가장 오래된, 최초의 야마자키 위스키 오크통.

야마자키 증류소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옆에 산이 있고 물이 좋아서라고 한다. 교토가 물이 좋고 채소 요리로 유명하다지. 이 연못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물이 정말 어찌나 맑고 깨끗하던지... 단풍도 물론 너무 아름다웠고.

연못. (같이 투어 하는 인원들이 꽤 있어 사람 없는 사람은 건지기 어려웠다...ㅠ)
단풍이 정말 너무, 너무 예뻤다... 자연의 색이란.

그리고 드디어, 투어의 마지막 순서인 시음 시작. 사실 좀 안습이었던 게... 첫 잔 딱 한 입 마시는 순간 알콜 기운이 확 느껴지면서 "앗, 이걸 다 마시다가는 이따가 벼르던 그 테이스팅을 할 수 없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안타까웠지만 각 잔마다 한두 모금씩만 맛보고 남겼다. 조금이나마 알콜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 다과도 다 먹었으나, 그래도 시음을 다 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았다. 내 옆에 혼자 온 백인 아저씨는 정말 다 탈탈 끝내시던데... (유독 몸이 안 받아주던 이 날... 알쓰인 나 어쩔... ㅠ)


다 엔트리급 위스키인 것으로 보이는데, 예상외로 야마자키 싱글몰트가 향이 좋고 맛도 꽤 복합적이었다. 뭐, 물론 이건 그전에 마신 세 잔이 더 엔트리급인 것(으로 추정됨)이어서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다만? 어쨌든 싱글몰트가 12년보다도 더 아랫급인데, 개인적으로 재패니즈 위스키는 유독 부드러워서 특색이 딱히 없지 않나... 하는 선입견이 있었기에 좀 의외였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다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 문득 내가 위에서 언급한 재패니즈 위스키가 정확히 뭐였는지 사진을 찾아보니 바로 이 야마자키 싱글몰트와 히비키 하모니였다...! 그때 다른 위스키들이랑 먹었을 때는 진짜 감흥이 없었는데. 역시나 어떤 것들끼리 테이스팅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나 보다. 이런 지극히 상대적인 평가라니.) 이 싱글몰트는 투어 끝나고 투어 참석자에 한해서 원가에 딱 한병 구매 가능하게 해 주어서 재빠르게 구매했다.

투어에 포함된 위스키잔(뒤에 박스)과 시음할 위스키 4종류, 약간의 다과. 초콜릿과 튀긴 숏파스타, 너트들. 맛있었다.
맨 뒤의 위스키는 원하는 경우 하이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향도 맡고, 시음도 하고, 색깔도 관찰하고.
시음하고 있다 보면 하이볼을 만들 수 있도록 세팅해 주신다. 야마자키 탄산수와 함께. (이곳에서만 구매 가능하다.)
맛있는 하이볼 만드는 법! 보고 따라 해 본다.

일본은 한국과 다르게 단맛 느껴지는 토닉워터가 아닌 탄산수 그대로를 사용하기에 술맛이 그대로 난다. 술을 잘 못 먹는 사람들은 토닉워터를 타 마시는 것이 먹기 더 편할 것이다.

내가 만든 하이볼! 얼음.. 멋있었으나 너무 커서 마시는데 좀 애먹었다! ㅎㅎ (내가 잘 넣지 못한 걸 수도?)

투어가 끝나고... 대망의 유료 테이스팅 라운지로 이동했다.

영롱하구나- (술 잘 먹는 척?)

사실 난 이미 오기 전부터 다 결정해 두었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것들로 시음하기로. 바로 하쿠슈 25년, 야마자키 25년, 히비키 30년 되겠다.

구할 수도 없고, 가격도 말도 안 되게 (병당 천만원 이상?) 치솟은 것들... 경험상 마셔봅니다!
이 세잔에 한화로 10만 7천원 정도 나왔다.
최선을 다해 시음 중

아... 그런데... 마시면서 또 너무 슬퍼졌다... 아까 시음할 때 그렇게 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내 몸에서 강한 알콜 기운이 느껴졌고, 이 위스키들 너무 맛도 있고 향도 좋은데! 아주 편~안~하게 음미하고 즐기고 싶은데! 그렇게 많은 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겨우 15 ml), 다 마시기가 너무 힘들었다... 테이스팅 라운지에서는 음식 섭취도 불가라 내가 가져온 도넛도 먹을 수가 없었고... 그래도 이 세잔만큼은 절.대.로 남기기 싫었고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혼자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는 물을 엄청 마셔가면서 한잔, 한잔 결국 힘겹게 끝냈다.


이 와중에 시음 후기로는, 개인적으로는 히비키 30년 - 하쿠슈 25년 - 야마자키 25년 순으로 좋았다. (솔직히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테이스팅 노트 같은 거 쓸 줄도 모르고, 남들이 길게 써놓은 테이스팅 노트 봐도 "진짜 저 정도로 느껴진다고?" 싶기도 하고, 내가 마실 땐 그냥 지극히 주관적/직관적으로 평가할 뿐이고. 결국 그냥 개인이 마시고 느껴봐야 하는 것 같다.) 그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히비키 30년은 정말 부드러웠다. 전에 여러 가지 위스키 테이스팅 했을 때는 타격감 빡! 오는 피트, 버번(그리고 그 외 다른 더 윗급 위스키들)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해서 야마자키랑 히비키는 좀 맹탕처럼 느껴졌었는데...(게다가 그중에서도 제일 엔트리급을 먹었으니) 이 위스키들은 단순히 밍밍한 느낌이 아닌, 깊은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견뎌낸 세월이 주는, 뭔가 유독 일본의 장인정신에 어울리는 점잖은 맛이랄까. 그런데 진짜, 지인짜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반쯤 맛이 간 내 몸 상태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쟁쟁한 위스키들끼리 놓고 마셔보니 야마자키 25년에서는 그렇게 특별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ㅠㅠ (물론 한잔씩 끝낸게 아닌 번갈아가며 비교 테이스팅 한거다.) 야마자키에서도 정말 격하게 “와! 너무 맛있어!! 이건 역시 차원이 다른 급이었어!”를 외치는 결말을 원했지만… 그러한 내적 외침이 나오지 않아 좀 안타까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솔직히 위스키 경험이 많지 않은 내 입맛의 한계일 수도 있다. 뭐 입맛은 주관적이니 답은 없겠다만… (지나가는 어느 위스키 애호가가 날 비웃는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지…이게 내 솔직한 후기다.)


아, 그나저나 일행이 있었더라면 난 한 모금씩만 맛보고 "너 다 마셔라~" 하고 다 줬을텐데... 나눠줄 일행도 없고 혼자 겨우 세 잔을 다 비웠고, 마지막으로 기념품 샵에서 몇 가지 구매를 하고 나와 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져온 도넛을 미친 듯이 입에 욱여넣었다...


알쓰인 내 자신을 그리 잘 알면서도 난 왜 가기 전에 내 속을 단단히 채워놓지 시켜놓지 않았는가... (아침 일찍 먹은 빵 하나와 다과로는 이 강한 위스키들을 감당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던 투어였다. 언젠가 또 올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더 장전해서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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