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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 맨 (2009)

코엔 형제가 건네는 덤덤한 위로

by HeeHee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 (2009) 도입부는 라시의 성서 주석 문구로 시작한다. 문구가 지나가고, 죽은 줄로 알았던 랍비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짧은 단편 우화가 이어진다. 그 랍비가 정녕 죽음에서 돌아온 자인지 끝내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는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우화가 바로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다.


“습관은 인간 삶의 위대한 안내자다. 오직 이 원리만이 우리의 경험을 유용하게 만들고,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유사한 일이 미래에도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게 만든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단지 과거에 반복적으로 함께 일어난 사건들을 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뿐이며, 실제로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고 무작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리어스 맨>의 주인공은 물리학 대학 교수 래리(마이클 스터버그)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단 2주라는 기간 동안 그에게 닥치는 연쇄 불행은 데이비드 흄의 철학의 구현체다. 한국계 학생 클라이브(데이비드 강)의 노골적인 뇌물 시도, 아내 주디스(사리 레닉)의 돌발 이혼 선언, 종신재직위원회에 보내진 래리를 비방하는 익명의 편지들. 추후 래리는 클라이브에게 뇌물 돈봉투의 출처를 추궁하며 “모든 행동에는 항상 결과가 따른다”고 그를 질타하지만, 클라이브는 래리가 단지 ”추측할 뿐“이고 그 추측은 ”아주 불확실하다“며 단숨에 그의 질타를 일축한다. 이는 마치 모든 일은 어떠한 일에 대한 결과로 ‘마땅히’ 일어나는 것이다, 라는 래리의 인과관계에 대한 굳센 믿음을 짓밟는 것과 같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그리고 래리는, 이러한 불운 속에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랍비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이 랍비를 만나는 여정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래리가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랍비 스콧은 래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이게 인생이고,” “신의 뜻이며,” “당신이 그 모든 걸 그냥 다 좋아할 필요는 없다,”라고 공허한 위로만 던질 뿐이다.


그 후 두 번째 랍비 나흐트너를 만나는 래리. 래리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신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뜻을 전하려고 하는 건지 질문한다. 이에 나흐트너는 뜬금없이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라는 메시지가 치아에 새겨져 있던 어느 치과 환자의 이야기만 해주고는,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인지 중요하냐며 되려 래리에게 반문한다. 이 치아의 의미는 자기도 모르며, 다만 다른 이를 돕는 것은 나쁠 게 없다, 라는 말과 함께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조언만 할 뿐.


설상가상으로 래리의 동생 아서(리차드 카인드)는 뜬금없이 불법도박과 남색으로 체포된다. 심적으로 버거워진 래리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하지만 일상을 이어가야 하는 그는 여전히 수업을 진행하고 (특히나 이제 이혼 절차 등으로 돈 나갈 곳만 많아진 래리는 이런 불운 속에서 더더욱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 원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절대 알 수 없음”을 증명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수업이 끝나고 퇴장하는 학생들 뒷모습을 향해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지라도 중간고사에 대한 책임은 다하라“며 그 누구도 새겨듣지 않는 외마디 조언만 외친다. 그렇게 이 불확실하고 억울한 현실 속에서도, 래리는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 의무는 철저히 지키며 일상을 겨우 이어가고 버텨낸다.


드디어 세 번째 랍비 마샥. 래리는 그토록 고대하던 랍비 마샥을 만나러 온다. 하지만 랍비 마샥이 ‘생각하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래리는 만남을 거절당한다. 래리는 또 한탄한다. 나는 “단지 삶의 구성원으로서 진중한 사람(a serious person)이 되려고 했을 뿐”이라고. 한편 아들 대니(아론 울프)는 성인식 바르미츠바를 치른다. 성인식을 마친 대니는 래리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던 랍비 마샥을 만나게 되지만, 랍비 마샥은 무언가 거창한 조언을 주기는커녕 “Be a good boy”라는 썰렁한 조언만 한다.


그리고 드디어 래리에게 일말의 행복이 찾아온다. 또다시 학교로 출근한 래리에게 그의 동료는 래리가 종신형 심사를 통과할 것이라고 미리 귀띔해 준다. 하지만 돈이 필요해진 래리는 결국 클라이브의 점수를 고치는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때 영화의 시작점에서 래리의 엑스레이를 찍었던 의사로부터 연락이 온다. 엑스레이 결과에 대해 이야기 좀 하자고. 전화보단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래리의 우려 깊은 얼굴을 유난히 오랫동안

포착한다. 그의 뒤로 보이는 창문에는 먹구름과 함께 비가 내리고 있고, 이 숏에서 그러한 배경과 래리의 ‘시리어스’한 얼굴이 유독 해상도 짙게 표현된다. (하지만

과연 그 ‘시리어스’함이 이미 정해진 것으로 보이는

그의 엑스레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까?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한낱 걱정 따위, 결국 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니의 학교에서는 토네이도가 대니를 포함해 대피하러 나온 학생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고, 카메라는 그 토네이도를 마냥 바라보고 서 있는 대니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잡고는 이내 그의 뒷모습을 다가오는 토네이도와 함께 포착한다. 마치 다가오는 재앙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 무력하게. 이때 대니의 이어폰에서는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 to Love”가 흐르는데, 이는 불확실한 인생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본성을 환기시킨다. 예측 불가능하고 파괴적인 토네이도는 래리가 겪는 인생의 혼란과 맞닿아 있지만, 영화는 끝내 그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시리어스 맨>은 인생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음을 강조하고, 토네이도는 곧 닥칠지 모를 또 다른 시련, 혹은 인생의 무상함, 그리고 인간이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연(또는 운명)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상징한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우리네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듯,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는 (브라이언 드 팔마 혹은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처럼) 화려한 편집의 기교나 (웨스 앤더슨 혹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처럼) 아름다운, 비현실적인 미장센 같은 것들은 없다. 단지 때때로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숏으로 마치 우리가 그 인물이 되어 삶의 고통을

공감하게끔 하는 연출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절제된 연출로 담백하게 우리가 인생을 받아들이고 관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듯이. 즉, 코엔 형제는 서사적

구성, 현실적 연기, 그리고 캐릭터 중심의 연출에 초점을 맞추고 영상미나 다른 부수적인 편집 기술로 우리의 시선을 스토리에서 분산시키지 않는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인공조차 소위 ‘스타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은 것은 정확히 코엔 형제가 의도한 바이다. 코엔 형제는 래리가 주변에서 친숙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익숙한 어느 한 사람(혹은 우리 자신) 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시리어스 맨>은 자신에게 닥친 여러 불행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닌 2주 동안 한 인간에게 정녕 이러한 악재들이 한꺼번에 몰려올 수 있는 건지 참 말도 안 되는 억지 아닌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또 아예 이런 일이 발생할 리 없다고 속단할 수 없는 게 사람 인생이다. 대체적으로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이러한 ‘부조리와 운명의 장난’ 혹은 ‘인간의 무력함’을 그린다. 대표적으로 <블러드 심플>(1984)에서는 불륜과 청부 살인을 둘러싼 오해와 불신, 그리고 탐욕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이 펼쳐지고, <파고>(1996)에서는 빚에 쪼들린 자동차 세일즈맨이 아내를 납치해 장인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다 예상치 못한 살인과 혼란에 휘말린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은 무작위로 주사위를 던져 사람들을 죽이는 킬러가 등장하여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폭력과 불확실성을 그리며, <번 애프터 리딩>(2008)에서는 헬스클럽 직원들이 우연히 손에 넣은 CD를 국가기밀로 착각해 CD 주인으로부터 돈을 뜯으려다 오해와 욕망이 뒤엉켜 예측불허의 소동이 벌어진다. 이 영화들 모두 어느

정도 삶의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리어스 맨>이 앞선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 래리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여 발생하는 어떠한 ‘결과’를 대응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무작위적하게 발생하는 일들을 순순히 ’당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반면 앞선 영화들에서는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하면서 그 행위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코엔 형제는 그들의 영화를 통해 ‘이래나 저래나 인생은 우리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시리어스 맨>을 보며 ‘인생은 결국 운빨’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우디 앨런의 <매치 포인트>(2005)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내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코엔

형제의 영화는 묘한 위로를 준다. 래리에게 닥친 모든 불행이 그의 잘못이 아니듯, 앞으로 우리에게 올 시련 역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라시의 문구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네가 아무리 ‘시리어스‘해도 인생은 어차피 무작위적이니, 너무 심각하게 굴지 말라고. 중간고사는 여전히 봐야 하고, 일상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결국 우리는 래리처럼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을 버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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