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을 가는 이유
7월에는 총 18편을 보았고, 영화관에 총 네 번 방문했다. 6월의 세 번에 이어 조금 더 늘었다. 이제는 영화관에서 굳이 볼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는 영화가 많아 영화관에 잘 안 가게 되었었는데, 재개봉한 것들도 있고 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그런데 요즘 영화관을 가서 영화를 보다 보니, 확실히 작은 노트북 모니터나 티비로 보는 것은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무슨 영화냐에 따라 다르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홍상수, 2025)
마치 연례행사처럼, 좋든 싫든 매년 개봉하는 홍상수의 영화를 꼭 영화관에서 본다. 그런데 올해는 홍상수의 신작이 정말 언제, 어느 영화관에서 개봉한지도 모를 정도로 유독 조용했던 느낌이었다. 내가 결국 이 영화를 볼 즈음에는 메이저 영화관에서는 아무 곳에서도 상영을 하고 있지 않았고, 정말 뜨문뜨문 독립영화관 같은 곳들에서만 상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에무시네마'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늘 그렇듯 난 뒷좌석을 선호해서 뒤로 예매했는데 웬걸...? 영화관이 매우 작은데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맨 뒤에서는 스크린이 잘 안 보이고 스피커였나.. 뭔가가 튀어나와 있어서 좌석이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결국 맨 앞으로 옮겼다. 에무시네마 1관은 맨 앞줄에 앉을 것, 메모.)
주인공 동화(하성국)는 유명한 변호사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시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게 자신의 삶의 방식에 맞다며. 그러다 우연히 여자친구 집에 방문하게 되어 여자친구 준희(강소이)의 가족들(부모님, 언니)과 만나게 되며 그 집에서 하루 머물게 된다.
스스로가 '시인'이라면서 한량처럼 지내는, 그러나 사실은 금수저 태생인 동화는,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자신의 배경을 애써 외면하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아간다. 동화는 시력이 나쁘지만 안경을 쓰고 다니지는 않는다. 뿌옇게 보는 것이 오히려 좋다며. 동화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하며 모른다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한다. 준희가 지적하듯이, 동화는 모른다는 것으로 도피해서 알려고 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애써 현실도피를 한다.
더 가관인 건, (준희의 부모가 그에 대한 뒷담화를 한 것과 같이) 그가 딱히 '센스'도 없다는 것이다. 저녁식사 중 준희의 부모님은 동화가 끌고 다니는 오래된 중고차를 언급하며, 자고로 차는 안전해야 하니 새 차를 사라고 하지만, 동화는 굳이 자신은 중고차가 좋다며 차를 바꿀 생각이 없음을 끝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아마도 그 부모는 딸의 안전이 걱정되어 그런 말을 했을 터. 그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본인 고집만 부리는 동화다. 그러다 만취한 동화는, 자신의 아버지를 계속 거론하는 준희의 언니 능희(박미소)에게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언성을 높이며 쌓아왔던 화와 불쾌감을 있는 대로 표출한다. 준희의 부모님 앞에서. 하지만 그가 여자친구의 가족들 앞에서 읊은 자작시는, 비루하고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다.
결국 다음 날 (본인도 민망했는지) 준희의 부모님께 인사도 없이 서울로 올라가다 차가 고장 났을 때, 동화는 나지막이 "이제 이 차는 좀 팔아겠다"라고 혼잣말을 한다. 드디어 깨달았을까? 본인의 알량한 자존심을.
어쩌면 이들이 유일하게 마음이 맞았을 때는, 다 같이 자연을 바라볼 때였을지 모르겠다. 일몰을 볼 때나, 뒷산을 걸을 때 등. 서로 말로 하는 소통은 더럽게 안되지만, 늘 한결같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있어주는 자연 앞에서는 다들 왠지 모르게 수용과 포용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 능희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결혼을 일단 미루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동생 준희에게 하는 말, "준비돼서 하는 게 어딨냐"며, "그냥 하는 거지. 다 준비되어서 하는 것은 없어"라고 한 소리 하는 것이 꼭 우리(관객)에게 하는 것 같았다.
Heat (Michael Mann, 1995)
7월에는 마이클 만에 꽂혀서 마이클 만 영화를 두 편(<히트>, <마이애미 바이스>)을 보았다. 그중 <히트>는 늘 듀오로 자주 등장하는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의 범죄 액션이다. 경찰인 알 파치노와 범죄자인 로버트 드니로가 표면적으로는 다른 양상의 삶을 살아가지만 사실 본질적으로는 서로가 매우 비슷한 부류임을 깨닫고는 묘하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사실 지금 이 시점에서 봤을 땐 그냥 무난하게(?) 볼 만한 액션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도 그렇고 <마이애미 바이스>, 그리고 기타 다른 마이클 만의 영화들은 그 당시 영화관에서 즐길만한 기가 막힌 오락물 같다. 관객이 영화를 보러 영화관으로 가는 이유와 그 기대에 철저히 부흥하는 영화 같달까. 일단 촬영이 기가 막히다. 기본적으로 마이클 만은 늘 액션 씬을 '정석'으로 잘 찍는 느낌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액션 씬을 찍어도 기본적으로 관객이 만족할만한 리얼한 씬. 거기에 더해 늘 범죄라는 큰 줄기에서 끈적한 로맨스까지 빠지지 않는다. (그에 걸맞은 느끼한 카메라 무빙까지.) 나야 뭐 작은 화면으로 보기 때문에 집중도는 덜 했지만, 보는 내내 90년대에 이런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본 관객들은 정말 즐거웠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Stop Making Sense (Jonathan Demme, 1984)
내 최애 아티스트 장기하가 <스탑 메이킹 센스> GV를 한다고 해서 달려갔다. (정식 개봉은 8월 13일이다). 장기하가 토킹헤즈의 덕후로 아주 오래전에 데이빗 번을 만나는 프로그램을 찍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 덕분에 이런 GV를 진행하게 된 것. 1983년 토킹헤즈 라이브공연 실황을 찍은 영화인데, 감독이 <양들의 침묵> 감독인 조나단 드미이다. 믿고 보는 A24에서 배급하는 재개봉 영화 (국내는 첫 개봉).
토킹헤즈는 국내에서 사실 좀 생소한 밴드이고, 나도 이름만 들어봤지 노래를 제대로 들어보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세상은 넓고 비범한 사람은 많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 80년대에 이런 무대를...? 진짜 미쳤다는 말 밖에는. 콘서트 자체도 무대연출이 대단하지만, 이걸 영화화하기 위한 촬영도 기가 막히다. 밴드 멤버 한 명 한 명 다 아주 적절한 시점에, 다양한 각도에서 비춰주는 카메라 워크. (나 같은 사람이라면 콘서트 내내 최대한 모두를 담으려 노력하며 '정직'하게 찍었겠지...?) 킬리언 머피를 닮은 프런트맨 데이빗 번의 기괴하면서 기상천외한 안무를 그냥 홀린 듯이 봤다. 막 개인적으로 음악이 다 되게 좋다!!! 이것까진 아닌데, 데이빗 번과 즐기는 밴드 멤버들을 보니 그냥 멋있더라. 그 옛날에 이런 신박한 퍼포먼스라니. 그래 역시 이런 건 크게, 크게 봐야 해. (그런데 찾아보니 데이빗 번의 독단적인 성격과 행동 때문에 밴드 멤버들과 갈등이 심해져 결국 해체했다고...)
장기하가 토킹헤즈로부터 영향을 어마어마하게 받았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니 알겠더라. 음악보다도 무대 연출이나 안무 같은 것에서. 그나저나 토킹헤즈가 국내에서는 다른 밴드에 비해 명성이 덜 한 이유가 약간 궁금합니다...? (친구에 의하면 미국 레코드샵에서는 토킹헤즈 노래가 늘 나온다고.)
Thelma & Louise (Ridley Scott, 1991)
이거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이유.
몇 년 전에 티비에서 이 영화를 해주길래 아마도 중반? 후반?부터 봤었던 것 같은데 제대로 보지 못한 느낌이 들어 재개봉 겸, 시간이 남던 어느 저녁 이 영화를 보았다. 사실 워낙 유명해서 아마도 이 영화는 안 봤어도 누구나 접해봤을 그 엔딩 씬 말고는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는데, 이 영화가 이렇게 매 씬이 아름다울 줄이야. 그 광활한 대자연을 가로질러 운전하는 기분을 큰 스크린으로 보니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두 여주인공들, 델마와 루이스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로드무비이자 일종의 성장기인데, 영화를 보면서 나도 같이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남자가 아니라 그런가... 근래 본 <F1>에서의 레이싱 장면보다도 이 영화의 로드트립이 훨~씬 좋았다.) 물론 델마가 정말 말도 안 되게 루이스에게 민폐를 끼치는 순간이 여럿 있기 때문에 보면서 빡침이 상당하지만, 사실 그렇게 어릴 때 세상물정 모르고 결혼해서 집에 갇혀있다시피 한 델마가 이제 막 바깥세상에 나와서 산전수전 겪으며 성장하는 성장캐이니, 그러한 캐릭터 설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순 있다. 게다가 음악도 한 몫한다. 음악감독이 한스 짐머... 휴 이야기가 변곡점을 맞을 때마다 그 무드에 맞게 음악이 바뀌는데, 이게 기가 막히다. (비슷한 장르/테마의 음악으로 영화가 쭉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경찰에게 잡혀가기 일보 직전, 델마가 루이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나도 눈물이 고이더라... "Let's not get caught. Let's just keep going." 마지막 장면이 왜 그렇게 아이코닉한지, 평생 회자되는 씬인지 영화관에서 보니 더 와닿았다. 역시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건 없어.
Drive (Nicolas Winding Refn, 2011)
'영화관에서 봤으면 정말 좋았을 걸...'생각이 든 영화가 바로 이 영화다. 왠지 모르게 라이언 고슬링의 얼빡샷(?) 포스터 때문에 보기를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본 영화. 그냥 단순히 카체이싱이나 드라이브가 중점인 영화 아닐까 생각했지...
시놉시스만 봤을 때는 <택시 드라이버>랑 비슷한 결인가 했는데, 이거, 완전 찐 로맨스 영화였다. 요즘 <F1: The Movie>의 브래드피트가 테토남이라고 회자되고 있는데, 아니 아니, 진정한 테토남은 이 영화의 라이언 고슬링이었네. 어쩜 그렇게 요란하지도 않고 드라이하게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캘리 멀리건과 그녀의 아들을 위해 라이언 고슬링은 그녀의 남편이 채무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저지르는 범죄를 자신의 운전으로(!) 도와주는 무모함까지 감행한다. 결국 남편이 죽는 비극으로 치닫고 캐리 멀리건은 라이언 고슬링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왠지 열린 결말로 미루어보다 이 둘은 재회하지 않았을까 싶다.
몇몇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캐리 멀리건의 남편이 죽고 나서 황급히 차로 도망치는 라이언 고슬링의 드라이브 씬. 여태껏 수많은 카체이싱 장면과 레이싱 장면을 봤지만, 항상 그냥 대자본이 투입된 액션 장면들이니 단순히 늘 '와 대단하네~' 정도로 봐 왔다면 이번처럼 '와... 운전 진짜 미쳤다...!'라고 생각이 든 건 거의 처음인 듯하다. 그리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가 캐리 멀리건에게 전화로 작별 인사를 하며 "당신, 그리고 베니시오와 함께 한 시간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었다"라고 한마디 하는데 그동안 별 말도 없던 그가, 그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로 꾸며진 대사나 기교적 연출 없이, 그 진심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서 오히려 더 애잔하기도 하고 그 감정이 더 묵직하게 전달되더라는.
라이언 고슬링을 죽이러 온 자와 캐리 멀리건과 함께 셋이 엘리베이터를 탄 장면에서는, 위험을 감지하고는 캘리 멀리건에게 키스를 하고(순간 세상이 이 둘을 제외하고 멈춘 듯한 슬로우 모션과 어두워진 조명 효과, 너무 좋았다) 바로 그 상대를 인정사정없이 죽이는 시퀀스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를 포함해서 살인과 폭력 씬들이 예상외로 상당히 고어하고 기상천외하게 잔인했는데, 그러고 보면 칸은 이런 유혈이 낭자하는 스타일의 영화들 참 좋아하는 듯.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미장센도 상당히 좋지만, 음악이 정말... 훌륭하다. 주로 신스웨이브와 일렉트로닉 음악이 흐르는데, 유럽 느낌의 클래식 팝 발라드 음악까지 나온다. <델마와 루이스>에서 처럼, 매 씬과 그 감정에 어울리는 다양한 음악이 아주 적재적소 사용된다는 것.
참고로 감독은 이름도 생소한 니콜라스 빈딩 레픈인데,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감독 선정권이 있던 라이언 고슬링이 이 감독의 전작 <발할라 라이징>에 크게 감명받아 직접 선택한 감독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드라이브> 말고는 크게 주목을 받은 작품은 딱히 없는듯하다. 그래도 <드라이브>는 참 인상 깊은 영화였다. 계속 여운이 남네.
아래는 음악이 인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장면 중 하나. (스포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