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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영화 결산

올해의 영화를 만나다

by HeeHee

10월에는 총 10편의 영화를 보았다. 양적으로는 부진했을지언정 질적으로는 꽤나 만족스러웠던 달이었다. 특히 올해 최고의 영화를 만나는 기쁨까지 누렸으니 말이다. 평소처럼 고전과 신작을 섞어서 봤는데, 이번에는 꽤나 훌륭한 작품들을 여럿 만났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 좋은 영화는 어떤 시대에나 존재하는구나,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 달이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

출처: 네이버 블로그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영화다. (물론 아직 올해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확신한다.)


오랜만의 폴 토마스 앤더슨(PTA) 신작이었다. 개봉 초반에 봤는데 사실 그렇게 큰 기대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포스터부터 뭔가 낯선 분위기였고, 큰 기대 없이 들어갔는데, 보고 나오면서 '그래, 바로 이게 시네마다!' 라는 생각부터 들더라. 스토리, 영상미, 편집, 연기, 음악 등, 모든 측면에서 훌륭한 종합예술이었다.


영화는 1960년대 혁명가 조직 프렌치 75(French 75)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조직의 멤버였던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를 과거의 숙적 스티븐 J. 록조(숀 펜)로부터 구하기 위해 또다시 싸움에 나선다. 영화는 이 큰 줄기 안에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낸다.


PTA가 최초로 시도한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액션 영화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이건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다. 정치 영화지만 정치적이라기보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혁명 이후 남겨진 삶, 이상이 좌절된 후의 허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것들, 뭐 크게 이런 것들이 영화의 핵심이다. 우리 개인 하나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우리가 이루지 못했거나 실패한 것들을 다음 세대가 이어가기를 바라며 그들을 양육한다는 것. 그런 의미의 영화다.


영상미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마지막 카체이싱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길이지만, 거기서 어떻게 이렇게 강렬한 긴장감을 만들어낼까. PTA와 촬영감독 마이클 바우만이 찾아낸 촬영지는 캘리포니아 보레고 스프링스 근처 '텍사스 딥(Texas Dip)'이라는 곳이다. 롤러코스터처럼 굽이지는 언덕길이 연속으로 이어진 이 지형이 영화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준다. 추격 장면은 세 가지 관점에서 동시에 진행된다—운전자가 보는 앞의 도로, 중거리의 언덕, 그리고 언덕을 넘을 때마다 차량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거리감. 특히 휠 하이 쇼트(바퀴 높이에서 촬영한 지표면)는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몰입감 있다. 마치 드라이버의 관점에서 포장도로가 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윌라가 탈주한 뒤 그녀를 추적하는 팀 스미스와의 생사를 건 추격전으로 전개되는데, 스미스가 윌라의 뒤를 쫓고, 아버지 밥도 같은 도로에서 스미스를 뒤따른다.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반복된다. 언덕을 넘을 때마다 상대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PTA는 이 불안정한 거리감을 활용해 전통적인 자동차 추격전의 음향 효과에 의존하지 않고도 순수한 시각적 긴장만으로 관객을 압박한다. 특히 윌라가 언덕 오르막의 사각지대에 차를 멈춰두고 길 옆에 숨었을 때, 전속력으로 내려오는 스미스의 차가 그 차를 미처 보지 못하고 들이받는 순간은 충돌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을 보고 있을 땐 마치 내가 바이킹을 타고 있는 듯이 울렁거리더라.)


조니 그린우드의 트랙 "River of Hills"는 이 장면에서 최대 긴장도에 도달한다. 수직적 프레이밍과 구르는 언덕의 깊이감이 만나면서 거의 어지러울 정도의 운동감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이 영화 역사에 남을 만한 탁월한 추격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PTA가 화려함이나 과도한 편집 없이도 순수한 지형의 변화와 카메라 워크만으로 서스펜스를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공간감각.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가 음악감독을 맡았는데, 영화음악이 너무 훌륭하다. 그는 PTA와 2007년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 여섯 번째로 협업하는 작곡가로, 이미 <팬텀 스레드>로 아카데미 음악상 노미네이트된 경력이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드럼과 기타, 피아노, 비올라, 옹드 마르트노 등 다채로운 악기를 동원해 풍부한 스코어를 구성했다. 기존에 있던 상업곡들(Steely Dan의 "Dirty Work", The Shirelles의 "Soldier Boy" 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현악기로만 이루어진 멜로디를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혁명의 핵심 인물들의 등장을 알리는 메인 트랙 "One Battle After Another"는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위로 풍부한 오케스트라가 더해져 작중 주요 상황마다 긴장감을 높인다. 각 씬에서 감정을 더욱 적절하게 고조시켜주는 음악들이 정말 압권이었다. 두 번째 관람할 때는 돌비 상영관에서 봤는데, 워낙 음악이 중요한 영화이니 음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느꼈다.


배우들의 연기도 물론 훌륭했다. 특히 록조를 연기한 숀 펜은 정말 미쳤다. 이제 정말 많이 늙었던데 그 비열하고 파렴치한 캐릭터와 비주얼이 너무나 찰떡이라 이 말 참 뭐하지만... 진짜 혐오스러웠다. 반면 체이스 인피니티는 이번 영화로 데뷔하는 신인 배우인데, 매력있더라.


사실 한 일주일(?) 정도만 상영될 예정이었던 영화였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후기들이 좋고 입소문이 나서인지 지금까지도 상영 중이다. 나도 영화관에서 두 번 봤다. 2시간 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듀얼 (스티븐 스필버그, 1971)

출처: 네이버 블로그

스필버그의 데뷔작이다. 그래서인지 <죠스>나 <E.T>, <쉰들러 리스트> 같은 그의 다른 대작들에 비해 덜 알려진 것 같다. 나도 이제서야 우연히 알게 된 영화다.


평범한 세일즈맨이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추월했다가 그 트럭에게 무섭게 추격당하는 내용이다. 단순한 설정이지만, 스필버그는 이 단순함으로부터 엄청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트럭 운전사의 얼굴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저 거대한 트럭이라는 존재 자체가 공포가 되는 것이다. 보는 내내 그 트럭이 어찌나 무서운지. 사실 귀신이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 존재들보다 이 거대한 기계 트럭이 훨씬 무섭더라. 정말 압도적 공포 그 자체.


28세의 스필버그가 45만 달러라는 저예산으로 만든 TV 영화가 유럽에서 극장 개봉까지 하게 된 작품이다. 어떻게 이런게 데뷔작이라니... 이를 시작으로 그 후 이어진 스필버그의 어마어마한 필모그래피를 보면 정말 이 사람은 감독으로 타고난 사람이구나 싶다. (천재는 역시 타고나는 법?) 단순하지만 강력한 스토리텔링, 긴장감 넘치는 연출, 뛰어난 카메라 워크. 스필버그 특유의 장인정신이 이미 데뷔작부터 두드러진다. 어떻게 저 시절에 이렇게 단순한 설정으로 그렇게 강렬한 긴장감을 연출해낼 수 있었는지. 정말 놀라운 감독이다.


그저 사고였을 뿐 (자파르 파나히, 2025)

출처: 네이버 영화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노 베어스>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 신작이다.


한밤중,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운전하던 남자가 개를 치는 사고를 낸다. 정비소에 들어간 그를 정비공 바히드는 의족 소리를 듣고 과거 자신을 고문한 정보관이라 확신하며 납치한다. 그리고는 고문을 당했던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가 이 남자가 정보관이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고문 당시 모두 안대로 눈이 가려 있었던 탓에 누구도 남자의 정체를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가 맞다는 확신을 갖는다.


영화는 불확실한 진실과 도덕적 혼란 속에서 인간성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해가는 과정, 정의와 복수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트라우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영화다. 주제 의식은 무겁고 중요하지만, 사실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좀 잔잔하게 흘러가서 긴장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달까.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만큼 분명 뛰어난 작품이겠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굿뉴스 (변성현, 2025)

출처: 네이버 영화

간만에 재미있는 한국영화가 나왔다. 마침내.


1970년 일본항공 351편 납치 사건(요도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적군파가 항공기를 납치해 평양으로 향하려 했을 때, 한국 정부가 김포공항을 평양으로 속여 착륙시킨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다만 감독 변성현이 자신의 영화 언어로 창작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는 만화 '내일의 죠'를 의미 있게 인용하는데, 실제로 적군파 멤버들이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는 역사적 맥락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변성현 감독이 저자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인용 허락을 받았을 정도로, 그 선택이 의도적이고 필연적이다. 블랙코미디, 스릴러, 정치적 풍자가 묘하게 섞여 있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납치된 비행기를 착륙시키고자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수상한 작전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홍경과 류승범이 눈에 띄었다. 홍경은 비밀작전에 투입되는 공군 중위 역을, 류승범은 작전을 지휘하는 정부 책임자 역을 맡았는데, 둘 다 자기 캐릭터를 제대로 살려냈다. 류승범은 볼 때마다 좀 신기하다. 그렇게 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심지어 해외에 나가 있을 때 공백기도 꽤 길지 않았었나?) 매번 연기를 이렇게 잘한다니, 배우로 타고난 사람이구나 싶다. 그리고 홍경의 외국어 실력에 완전 놀랐다. 유학파도 아닌 배우 중에 배워서 영어를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일본어도 (일본어 문외한이지만 내 귀에는) 잘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영어도 그렇게 하는거 보면 일본어도 잘한거겠지 뭐. 앞으로 꽤나 기대되는 배우다.


간만에 오락용으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꽁치의 맛 (오즈 야스지로, 1962)

출처: 쇼치쿠필름


오즈 야스지로는 늘 이렇게 주인공들에게 거울치료를 하게 만든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타인의 삶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면서 자연스레 성찰하는 경험을 통해.


홀로 된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고 쓸쓸한 황혼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처음엔 딸을 시집보낼 생각이 없던 그가, 오래된 스승을 모시며 사는 자신의 늙은 딸을 보다가 깨닫는다. 자기도 딸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결국 딸을 시집보낸다. <만춘>, <가을 햇살>, 그리고 이 <꽁치의 맛>까지. 모두 비슷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오즈의 영화들은 주로 부녀관계나 가족관계를 다루는데, 구조가 비슷해서 이제는 구분이 잘 안 가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마치 홍상수 영화를 여러편 보고 나면 어느 순간 각 영화의 내용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 같달까.)


오즈 특유의 다다미 쇼트, 정갈한 프레임, 최소한의 대사. 오즈 영화들의 미장센은 정말 훌륭하다. 매 장면마다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각이 맞춰지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정결함을 넘어, 오즈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담겨 있다. 오즈가 고집한 다다미 쇼트(일본인들이 앉아서 생활하는 눈높이)는 누구도 다른 누구를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지 않게 한다. 그런 미장센 속에서 인간의 고독과 삶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영화 제목처럼 '꽁치의 맛', 그러니까 평범하지만 특별한, 담백하지만 깊은 맛이다.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가 홀로 앉아있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야스지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이 영화를 만든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이 영화가 그의 유작이 됐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고 나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진다. 일본 영화의 거장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파리의 랑데부 (에릭 로메르, 1995)

출처: 네이버 블로그

로메르 영화의 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작품이다.


Rendez-vous는 프랑스어로 '만남', '약속'을 뜻한다. 영화는 파리를 배경으로 세 개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7시의 랑데부', '파리의 벤치',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 1907'. 각각의 에피소드는 파리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첫 번째 에피소드 '7시의 랑데부'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가 벌이는 다소 귀여운(?) 복수극이다. 남자친구와 그의 다른 여자가 만나는 장소에 일부러 나타나 같은 시간에 같은 남자를 '우연히' 만나는 방식으로 말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파리의 벤치'는 어느 여자와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 두번째 남친의 이야기인데, 둘이 그 여자의 기존 남친도 바람피는 장면을 목격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세 번째 에피소드 '어머니와 아들, 1907'은 원래 만나던 여자를 떼어내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여자를 막무가내로 쫓아가는 화가의 이야기이다. 이 남자는 그 처음 본 여자를 따라가 여자가 좋아할만한 번지르르한 말들만 늘어놓는다. 결국 각 에피소드는 파리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로메르 영화 특유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인물들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만남은 우연 같지만 마치 필연처럼 느껴진다.


로메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끊임없는 대화다. 인물들은 계속 말을 하는데, 그 말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관객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유하게 된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의 화가가 패기 있게 여자를 쫓아가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그 패기가 좀 웃겼달까. (생각해보니 예전 여느 홍상수 영화의 남자 캐릭터들과도 비슷한 느낌 같기도.)


로메르 영화를 보는 재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화려한 영상미나 극적인 스토리는 없지만,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이 모두 어우러진다. 보는 내내 파리를 산책하는 기분이다. 게다가 90년대라는 시대가 주는 빈티지한 감성까지 더해져 뭔가 기분이 편안해진다. 로메르는 공간 묘사가 정말 탁월한 감독이다. 파리의 거리, 카페, 공원, 미술관 같은 공간들이 마치 다큐처럼(좋은 의미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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