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너무나도 공허했던 한 달
11월은 정말 영화를 많이 못 봤다. 겨우 5편. 근 몇 년간 가장 저조한 달인 듯...? 돌이켜보니 11월 갑자기 회사 내/외부적으로 내 정신을 갉아먹을 정도로 피폐하게 하는 업무들이 많아서 영화를 많이 못 본 듯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사람이 여유가 있어야 문화생활도 하고 그런 것이다. ㅠㅠ 하지만 꽤나 흥미로운 영화들을 봐서 나름 괜찮다고 위안 삼아 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을 포함해 로버트 알트만과 우디 앨런의 작품들을 만나면서, 각 감독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고작 5편 봤으니 고를 필요 없이 각 영화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다.
부고니아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5)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부고니아>. 한국의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작이라고는 하지만, 특히 스타일 측면에서 꽤나 다른 영화처럼 보인다.
소신발언을 하자면, 나는 사실 원작파가 아니다. 왜 그렇게 이 작품이 영화광들에게서 명작(?) 취급을 받는지 모르겠다(고작 관객은 7만 명이라고 하는데?). 보면서 너무 재미없기도 하고, 그렇다고 미적으로 딱히 인상적이지도 않아서(오히려 불쾌한 쪽에 가까운...) 대충 숙제하듯이 보고 보고 난 후 거의 기억에서 지운 듯하다.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는 뜻이다.
영화는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믿는 두 청년이 대기업 CEO를 외계인이라 확신하고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표면적으로는 황당한 음모론과 범죄 이야기지만, 란티모스는 이를 고대 그리스의 '부고니아' 신화(죽은 황소에서 벌이 생겨난다는 잘못된 믿음)와 엮어내면서 현대 미국 사회의 불안과 광기에 대해 말한다.
어쨌든 이 <부고니아>는 란티모스 특유의 냉소와 미학으로 원작을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엠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가 다시 란티모스와 작업했는데, 특히 제시 플레먼스의 연기가 눈에 띄더라.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보통 메소드 연기를 구사하거나 굉장히 자연스러운, 절제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제시 플레먼스는 후자다. 오버하는 것 없이 굉장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또 감정을 폭발시킬 때는 아주 적절하게 폭발한다.
그 외 상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연코 영상미와 음악이었다. <가여운 것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 이어 로비 라이언이라는 촬영감독이 촬영했다. 그는 이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비스타비전 카메라로 촬영했는데, 색감이 꽤나 독특하다. 특히 파란색과 주황색, 그리고 회색톤의 대비가 상징적으로 기능하는 방식이 너무나 세련됐다. 그리고 란티모스의 영화들이 항상 그렇듯, 화면 구성이 매우 기하학적이고 완벽하게 짜여있었다. 프레임 안에서 객체와 인물의 배치가 모두 의도적이고, 한 점의 어긋남도 없는 그런 영상의 시네마토그래피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저스킨 펜드릭스의 사운드트랙은 신스 사운드와 현악기를 조합해서 불안감과 우아함을 동시에 전달한다. 긴장이 예상되는 장면에서는 차가우면서도 극적인 음악이 화면의 미적 완성도를 한 층 끌어올린다. 마치 음악이 화면을 고정시키는 것처럼.
원작은 너무나도 재미없게 봤던 기억만 있지만... 똑같이 황당한 설정인데도 불구하고 관객을 빨아들이는 몰입감이 있던 영화였다. 란티모스의 연출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세련된 영화.
세 여인 (로버트 알트만, 1977)
<세 여인>은 알트만이 꿈에서 본 이미지를 그대로 영화로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알트만은 병원에서 아내를 간호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쉘리 듀발과 시시 스페이식이 나오는 영화를 찍고 있었다고 한다. 깨어나서 메모를 하고 다시 잠들었는데 꿈이 이어졌다고. 사실 영화가 뭐랄까, 구체적인 서사가 있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몽환적인 느낌이 강한데, 아마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캘리포니아 사막의 작은 마을에서 요양원에서 일하는 밀리(쉘리 듀발)와 그녀를 동경하는 핑키(시시 스페이식), 그리고 임신한 화가 윌리(제니스 룰)의 이야기를 그린다. 처음에는 밀리가 끊임없이 떠들고 자기 과시를 하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핑키만이 그녀를 동경하며 따라다닌다. 그런데 핑키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부터 두 사람의 정체성이 뒤바뀌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크게 무의식, 지배와 욕망과 같은 심리적 요소를 다룬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싶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느낌이랄까.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알트만 본인도 이 영화를 "텅 빈 풍경 속의 텅 빈 그릇들"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정말 적확한 표현인 것 같다. 인물들이 텅 빈 사막 같은 곳에서 서로의 정체성을 채우려 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공허한...
쉘리 듀발은 <샤이닝>에서 잭 니콜슨의 부인으로 나온 배우인데, 마스크 자체가 너무 독특해서 한번 보고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얼굴 자체가 좀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배우로서는 큰 장점일 수도...?), 이 영화의 황량하고 기이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마스크이다. 밀리라는 캐릭터 자체가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데, 듀발의 외모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강화한다. 그녀가 연기한 밀리는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데이트 약속을 잡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공허함 속에서도 계속 노력하는 밀리의 처절함이 꽤나 생생하게 전해졌다.
엔딩은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오픈 엔딩인 것 같다. 세 여자가 결국 하나의 가족(혹은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정확한 서사를 따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느끼는 것에 가까운 영화인 것 같으니.
논-픽션 (올리비에 아사야스, 2018)
아사야스의 <논-픽션>은 제목 그대로 '허구가 아닌' 이야기를 다룬다. 파리의 출판계를 배경으로 두 쌍의 커플과 그들을 둘러싼 불륜, 기술 변화, 그리고 끊임없는 대화를 그린다. 출판사 편집장 알랭(기욤 카네)과 그의 아내이자 배우인 셀레나(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작가 레오나르(뱅상 마케뉴)와 그의 아내. 이들은 만나면 계속 떠든다. 기술의 변화, 책의 미래,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리고 각자의 불륜에 대해. (그나저나 줄리엣 비노쉬 안 나오는 프랑스 영화는 없는 건지...? 대체 얼마나 다작을 한 건지, 늘 그녀만 나오는 기분인데... 이젠 좀 식상하달까... ㅠ)
이 영화는 정말 '프랑스 영화'답다. 거의 모든 장면이 카페나 레스토랑, 또는 침대에서 벌어진다. 사람들은 만나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말을 하고, 애정행각을 한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매 장면 대화가 끊기지를 않는다. 출판계가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기에 대한 논의, 블로그와 SNS에 대한 세대 간 인식 차이, 자기 작품에 실제 인물을 등장시키는 작가의 윤리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논쟁하는데,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어서 꽤나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뭔가 대단한 감동이나 카타르시스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냥 파리지앵들의 수다를 엿듣는 기분으로 보면 된다. <퍼스널 쇼퍼>나 <씰스 마리아의 구름> 같은 아사야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좀 평이하지만, 그래서 더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퍼스널 쇼퍼>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해서 불호였던 영화...)
럭키 데이 인 파리 (우디 앨런, 2023)
우디 앨런의 50번째 영화이자 첫 프랑스어 영화. 원제는 "Coup de Chance"인데, "뜻밖의 행운"이라는 뜻이다. 한국 개봉 제목은 아마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흥행에 기대려는 의도가 보이는 <럭키 데이 인 파리>.
파리의 상류층 커플 파니(루 드 라쥬)와 장(멜빌 푸포). 어느 날 파니가 거리에서 고등학교 동창 알랭(닐스 슈나이더)과 우연히 마주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은 뉴욕에서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제 파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것이다. 그리고 이 '우연'은 점차 불륜으로, 그리고 위험한 상황으로 번져간다.
우디 앨런은 이 영화에서 계속 '운명'과 '우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알랭이 집필 중인 소설도 운과 아이러니가 주제이고, 영화 내내 "이건 우연이 아니면 뭐겠어"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심지어 "40억 분의 1이라는 기적"이라는 대사까지 나온다. 우리가 태어난 것 자체가 얼마나 낮은 확률의 기적인지, 그런 기적과 기적이 만난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말하는 거다.
90세의 우디 앨런이 여태 늘 해오던, 삶과 만남에 대한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다만 이번에는 독특하게도, 우디 앨런의 초기작에서 보였던(<맨하탄 살인사건>) 코미디 요소가 근래 그가 주로 작업하는 로맨스 장르와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우디 앨런 영화를 여러 편 본 사람이라면 아마 그 공식을 알고 있을 것이고, 이 영화가 대충 어떻게 흘러갈지 감이 올 것이다. 스토리는 딱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경과 재즈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
스윗 앤 로다운 (우디 앨런, 1999)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운 좋게 우연히 발견했다. 우디 앨런 영화에 숀 펜이라니.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재즈 기타리스트 에밋 레이(숀 펜)의 이야기이다.
에밋 레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기타리스트다. 첫 번째는 장고 라인하르트.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우디 앨런을 포함한 재즈 전문가들이 카메라 앞에서 에밋 레이에 대해 증언한다. 물론 에밋 레이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생생하게 그려져서 실제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에밋 레이는 천재이지만 완벽한 쓰레기 인간이다. 술을 마시고, 창녀를 운영하고, 도박을 하고, 여자를 학대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벙어리 여자 해티(사만다 모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해티는 말을 못 하지만 그의 음악을 이해하고, 무조건적으로 그를 사랑한다. 사만다 모튼은 대사 하나 없이 표정과 몸짓만으로 연기했는데, 꽤나 순애보 여자의 이미지를 잘 표현했다. (사실 그녀 얼굴 자체가 너무 "나 착해요"이다...) 이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재즈 음악이 너무 좋아서 음악만 듣는 기분이었다. 에밋 레이의 기타 연주가 인상적이다. 우디 앨런이 재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영화 곳곳에서 느껴진다. 1930년대의 복고적인 분위기, 스모키한 재즈 바, 그리고 에밋 레이가 기타를 치는 순간만큼은 모든 게 용서되는 순간들.
문득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사실인데, 그러고 보니 우디 앨런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츤데레 같은 캐릭터들이 많다는 것. 여자한테 틱틱대면서도 자기 여자를 기분 좋게 해 주려 노력하는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데, 그래서 참 별로인걸 알면서도 또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었다. 에밋 레이가 해티를 떠나보내고 난 후,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영화 내내 사랑 따위에 절대 자신의 "아티스트" 인생을 걸 수 없다고 자부하던 그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