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와 뱀파이어의 조합이라니.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영화 같다”는 느낌을 준 작품 중 하나가 라이언 쿠글러의 〈씨너스: 죄인들〉(이하 〈씨너스〉)이다. 국내에서는 조용히 사라졌지만, 북미에서는 호평과 함께 약 3억 6,700만 달러의 흥행을 올렸고, 2026년 골든글로브에서 작품상(드라마)·감독상·각본상·남우주연상·음악상·주제가상 등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블루스, 그리고 미국 남부 흑인·노예제와 짐 크로우 시기를 전면에 내세운 시대극이라는 점이 관객의 진입 장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미션 임파서블 같은 익숙한 프랜차이즈와 동시에 개봉한 일정까지 겹치면서, 상대적으로 문화적 거리감이 큰 <씨너스>가 극장 선택지에서 밀려났다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 영화는 어디선가 본 IP의 연장이 아니라, 쿠글러가 처음부터 써 내려간 오리지널 각본이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그는 지금까지 〈프루트베일 스테이션〉(실화), 〈크리드〉(〈록키〉 스핀오프), 〈블랙 팬서〉 시리즈(마블 IP)처럼 기존 텍스트 위에서 이야기를 쌓아 올려왔지만, 〈씨너스〉에서는 처음으로 완전히 자신만의 신화와 세계를 발명한다. 그 결과 이 작품은 National Board of Review에서 ‘최고 오리지널 각본상’을 받았고, 쿠글러는 “프랜차이즈 코스를 한참 요리한 뒤, 정말 단순한 그릴드 치즈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작 완성된 영화는 꽤나 복잡한 그릴드 치즈에 가깝지만.
라이언 쿠글러가 구축한 자신만의 세계
〈씨너스〉의 발단은 그의 개인사와도 맞닿아 있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길고 지친 제작을 마친 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외삼촌을 떠올리며 블루스를 듣다가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자라온 동네, 가족의 기억, 삼촌이 사랑하던 음악들이 겹치면서 1930년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한 뱀파이어 영화라는 특이한 발상이 나온 셈이다. “극장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프로덕션 회사 Proximity Media의 목표를 이 영화는 장르와 규모, 형식 면에서 모두 밀어붙인다.
영화는 “음악을 그토록 진실되게 만드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생과 사의 장막을 뚫고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이라는 취지의 문구로 시작한다. 단순한 인용문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를 미리 선언하는 문장이다. 이후 서사는 이 문장을 따라 블루스가 산 자와 죽은 자, 인간과 뱀파이어, 과거와 현재를 서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짐 크로우 시대와 블루스
배경은 1932년 미시시피 델타. 쌍둥이 형제 스택과 스모크(모두 마이클 B. 조던)는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음악을 두고 전혀 다른 태도를 드러낸다. 스택은 아버지가 남긴 기타를 되찾아 다시 연주하려 하고, 스모크는 음악을 “악마의 문”으로 여기며 단호히 차단한다.
스택이 선택하는 해법은 도망이 아니라 공간을 새로 여는 일이다. 그는 주크조인트(juke joint)라 불리는 음악 홀을 세운다. 주크조인트는 당시 남부 흑인들이 일과 차별의 피로를 풀며 음악과 춤을 즐기던 비공식적인 술집이자 사교 공간이다. 이 세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인물이 바로 어린 블루스 기타리스트 새미다. 새미(마일스 캐튼)는 목사 제디다이어의 아들이지만 교회 찬송 대신 ‘악마의 음악’이라 불린 블루스를 연주하고 싶어 하고, 스택이 세운 주크조인트의 하우스 밴드로 무대에 오른다.
새미의 블루스가 주크조인트를 가득 채우는 순간, 영화는 오프닝 문구를 문자 그대로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의 연주는 손님들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넘어 이 세계의 밖에 있는 존재들까지 끌어당기는 신호가 된다. 2,000년 이상을 살아온 아일랜드 뱀파이어 렘믹(잭 오코넬)이 미시시피의 이 작은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음악이다. (이 대목에서 얼핏 타란티노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단순 오마주나 모방이라기보다는 같은 장르 전통을 자기 방식으로 변주한 경우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필름을 통한 변주
〈씨너스〉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내용뿐 아니라 “어떻게 찍을 것인가”라는 형식의 차원에서도 꽤 과감한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앙드레 바쟁이 말했듯이 영화의 형식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이다.
〈씨너스〉는 처음에는 16mm 필름으로 찍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쌍둥이 형제를 한 화면에 자연스럽게 함께 세워야 하는 VFX 요구사항 때문에 더 많은 정보량과 안정적인 네거티브를 제공하는 65/70mm 포맷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미시시피 델타의 평야, 지평선, 늪과 강을 이전 흑인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스케일로 담아내게 만든다.
특히 일부 시퀀스는 IMAX 65mm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렘믹이 말을 타고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IMAX 스크린에서는 화면이 위·아래로 확장되면서 관객의 주변 시야까지 화면이 밀고 들어온다. 미시시피의 하늘, 흙먼지, 멀리 나는 새의 궤적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공간”이 되는 순간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행동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아니라 시간과 분위기 자체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시간-이미지’에 가까운 구성이다.
주크조인트, 음악과 카메라가 함께 춤추는 공간
이 선택은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이기도 하다. “자연과 역사의 웅대함”을 위해 쓰이던 IMAX와 70mm를 지금까지 대형 스크린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흑인 공동체의 공간과 얼굴에 할당하는 일. 쿠글러가 “문화적 재현의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 그 말이 추상적인 구호로 끝나지 않고 필름 포맷과 화면비 같은 매우 구체적인 층위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형식 실험은 촬영 포맷에서 그치지 않는다. 쿠글러는 특히 주크조인트 장면들을 준비할 때 요즘 블록버스터에서 흔히 쓰는 프리비즈(pre-viz) 대신 시드니 루멧식 리허설을 택했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실제 세트에 모여 장면을 걸어보며 누가 어디에 서고, 카메라는 어느 지점에서 들어오는지 몸으로 찾아가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 음악감독 루드비히 고란손과 그의 아내 세레나도 함께 참여해 리허설 현장에서 직접 연주를 들려주며 장면의 리듬을 조율했다고 한다. 그래서 〈씨너스〉의 많은 장면들은 “대본 → 콘티 → 촬영”의 일방향 흐름이라기보다 배우의 동선, 음악의 템포, 카메라 위치가 서로를 밀고 당기며 만들어진 결과물에 가깝다. 바쟁이 말한 “프레임 안의 모든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총합으로서의 미장센”이 이 영화에서는 꽤 문자 그대로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스웨덴 소년의 블루스란
이 영화의 음악감독은 84년생 스웨덴 태생의 음악감독 루드비히 고란손(Ludwig Göransson)이다. 그는 미국 남부 출신이 아니라 스톡홀름 교외에서 자랐지만, 블루스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가 1950~60년대 레코드를 통해 아들에게 이 세계를 물려줬다. 알버트 킹 같은 연주자들의 VHS 영상을 반복 재생해 주며, 블루스 음악에 일찌감치 노출을 시켰다고. (참고로 고란손은 "힙합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놀란의 <테넷>과 <오펜하이머>의 음악감독으로도 참여했다. 다방면에 재능 있는 사람들 참 많다...)
〈씨너스〉를 준비하면서 고란손은 아버지와 함께 멤피스로 떠나 블루스 클럽과 교회를 돌아다니며 현장 조사를 했다. 그리고 뉴올리언스에 지어진 영화 세트에 거의 매일 머물며 1932년식 도브로 리소네이터 기타 한 대로 20편이 넘는 곡을 만들어냈다. 그가 “결국 모든 대중음악은 블루스에서 나온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은 이 영화 안에서는 과장이 아니라 실제 설계도에 가깝다.
고란손의 스코어는 전통 델타 블루스, 흑인 교회 음악, 아일랜드 민속음악, 메탈의 질감을 한데 겹친다. 흑인과 아일랜드라는 두 집단 모두가 역사적으로 식민지배와 빈곤, 이주를 겪은 집단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렘믹의 아일랜드 음악과 새미의 블루스가 한 무대에서 엇갈리는 장면들은 단순한 스타일 믹스가 아니라 “누구의 고통이 음악의 중심에 설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를 빠는 자와 문화를 빠는 자: 뱀파이어가 상징하는 것
여기서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을 끌어오면 영화가 하려는 말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홀은 흑인의 재현(representation)이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이상의 문제라고 했다. 오랫동안 타자의 대상으로만 소비되어 온몸을 어떻게 다시 자기 서사의 주체로 세울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더 이상 그렇게 소비되지 않게 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뜻이다.
〈씨너스〉에서 뱀파이어 렘믹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이 질문의 구체적인 형상이다. 그는 2,000년을 산 아일랜드 뱀파이어이자, 역사적으로 흑인 음악을 흡수하고 상품화해 온 백인 음악 산업을 의인화한 존재다. 렘믹은 새미에게 영생을 제안하며 그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계약의 본질은 간단하다. 새미의 피와 재능, 곡들은 렘믹의 레이블과 이름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흡혈'이라는 장르적 장치가 왜 이 이야기에서 그렇게 잘 맞아떨어지는지가 분명해진다. 피를 빨아 삶을 연장하는 존재와 특정 집단의 문화와 노동을 흡수해 자본을 축적하는 시스템 사이에는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공포는 결국 새미의 몸이 물리적으로 상처받는 순간뿐 아니라, 그의 음악이 누구의 이름으로, 어떤 이야기로 기록될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아트하우스와 그라인드하우스의 충돌: 오리지널 각본의 승리
한 평론가는 〈씨너스〉를 “아트하우스와 그라인드하우스를 정면으로 섞어버린 첫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라고 표현했다. 고급 영화제에서 볼 법한 형식 실험과 한밤중 상영관에서 볼 법한 피 튀기는 장르 쾌감이 같은 프레임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쿠글러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 결과가 그리 이상하지 않다. 그는 저예산 인디 드라마(〈프루트베일 스테이션〉)로 시작해 스포츠 멜로와 가족 드라마(〈크리드〉)를 거쳐 슈퍼히어로 스펙터클(〈블랙 팬서〉)에 이르기까지 늘 장르와 규모를 넓혀왔다. 〈씨너스〉는 그가 쌓아온 감각이 한 번에 터져 나온 꽤 사치스러운 실험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런 선택이 지금의 할리우드 환경에서는 꽤 위험한 도박이었다는 점이다. 상위권 박스오피스의 절반 이상이 기존 IP에 기대고 있는 상황에서 완전 오리지널 각본에 9,000만 달러 규모의 예산을 쓴 영화가, 게다가 R등급 (우리나라로 치면 청불) 뱀파이어 영화가 이렇게까지 흥행과 시상식 양쪽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귀에 남는 소리, 영화다운 영화
결국 〈씨너스〉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 영화가 한편으로는 “블루스와 뱀파이어가 만나는 특이한 호러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의 목소리가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기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아주 물질적인 방식으로 다시 묻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스택과 스모크, 그리고 새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하려 한다. 음악을 버리고 신앙을 택할 것인가, 신앙을 버리고 음악을 택할 것인가, 혹은 둘 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
쿠글러와 고란손,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들은 이 질문을 블루스의 리듬, 70mm 필름의 질감, IMAX의 압도적인 스케일 위에 올려놓는다. 〈씨너스〉를 영화관에서 보고 나오면 "아주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종합예술"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단순히 "예술"에 그치지 않고 "오락성"까지 겸비한. 이런 감각이야말로 이 영화가 무엇보다도 “영화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지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