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달이니만큼 날것의 솔직한 감상평을
25년의 마지막 달은 총 14편의 영화를 감상하며 마무리했다. 어쩌다 보니 올해 개봉작들을 꽤나 많이 본 달이었는데, 12월을 시작하고 닫은 작품들이 유독 좋아 기억에 남는 반면, 늘 그랬듯 역시나 그저 그랬던 작품들도 있었다. 마지막 달이니 만큼 이번에는 좀 (괜히?) 가감 없이 느낀 점을 기록해 본다.
국보 (이상일, 2025)
야쿠자 조직의 지도자였던 아버지를 잃은 14세 기쿠오(요시자와 료)가 유명한 가부키 배우의 제자가 되어 혈통으로 이어지는 가부키 전통에 맞서 결국 국보로 거듭나는, 예술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는 이야기.
아, 결론적으로 너무나 아름다웠던 가부키 영화였다.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때문에 지루하게 느낀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영상이 너무 멋있어서 이 긴 시간 동안 가부키 공연을 보는 것 같은, 새로운 문화 체험이었다.
생각해 보니 가부키라는 것을 단순히 얼굴을 하얗게 칠한 일본 전통 연극 정도로만 인식했지, 이렇게 제대로 공연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부키 배우들의 움직임부터 표정, 음성 톤까지 모든 것이 아주 잘게, 잘게 쪼개어져 계산되고 다듬어진 예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집안 대대로 전수되는 예술이라는 것도. 주인공들의 연기도 훌륭해서 각자 느끼는 질투, 좌절감 등 그 감정의 변화도 너무 잘 느낄 수 있었고, 중국의 경극과는 는 또 다른 미학을 지닌 일본의 전통 예술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우리나라에도 탈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부키나 경극 같은 것에 대적할 만한 화려함이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다.
사실 12월에는 그렇게 인상 깊은 작품을 보게 될 거란 기대를 안 했는데, 초반부터 예상을 깬 작품이었다.
페니키안 스킴 (웨스 앤더슨, 2025)
복잡한 과거와 야망을 지닌 사업가 자자 코다(베니시오 델 토로)가 평생의 숙원 사업인 ‘페니키안 스킴’을 완수하기 위해 수녀로 살고 있던 외동딸 리즐(미아 트리플턴)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집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적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며 자자의 계획에 균열이 생기자, 그는 딸 리즐과 가정교사 비욘(마이클 세라)을 데리고 주요 동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페니키아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역시나... 믿고 거르는 웨스 앤더슨이다.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봤다가 또 "자발적으로" 내 인생의 몇 시간을 재미도 감동도 없는 콘텐츠에 소비했다는 기분에 꽤나 불쾌해졌다... 이미 전에도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는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긍정적인 마음을 먹고 이 작품의 좋은 점을 애.써. 찾아본다면, 웨스 앤더슨 그 특유의 "예쁜 이미지"만 볼 만하다. 정교한 세트와 배색, 대칭의 미학... 시각적으로는 정말 아름답다. 그런데 그게 다다.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영상의 아름다움으로 관객을 끌어당기려 하지만, 알맹이가 없으면 얼마나 오래 들려줄 수 있나? 그럴 거면 그냥 미술 작품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따라잡기 힘든 대화 속도와 전개도 없이 마구 던져대는 대사들...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 튀려고 애쓰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작위적이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걸 누군가에게 설명해줘야 한다면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음... 영화 예쁘더라" 정도? 이 감독이 복제 스타일을 언제까지 답습할 건지 궁금하다. 아 개인적으로 미장센만(!) 좋은 영화도 좋아하는 경우가 꽤 있긴 한데, 진짜 웨스 앤더슨은 좀 힘들다.
어글리 시스터 (에밀리 블리치펠트, 2025)
신데렐라 동화를 재해석한 이야기. 아름다운 의붓언니 아그네스(테아 소피 로흐 네스)와 왕자의 마음을 놓고 벌이는 엘비라(레아 미렌)의 피비린내 나는 미모 경쟁기.
<서브스턴스>와 같은 맥락에서 "미"에 집착하는 여자의 고군분투 외모 환골탈태 이야기다. 바디 호러가 동반된다.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노력과 고통이 따른다. 극단적이고 자학적인 수준까지 갈 수 있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자연미인을 이길 순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것 앞에서는 얄팍한 노력이 되는 것 같은... 그런 비극 같은 현실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성에게 있어 아름다움의 기준이 얼마나 억압적인지, 그것을 따르려다 자신을 얼마나 망치는지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불편한 영화지만, 필요한 영화다.
제이 켈리 (노아 바움백, 2025)
유명한 영화배우 제이 켈리(조지 클루니)가 매니저 론(애덤 샌들러)과 함께 유럽으로 시상식 수상 트로피를 받으러 떠나면서, 그동안의 선택 그리고 가족 관계를 포함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노아 바움백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나름 볼 만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특히 주연인 조지 클루니가 골든 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약간의 기대를 품고(?) 본 영화다.
그런데 뻥 안치고, 자기 전에 보려고 늘 틀다가 계속 잠들어서 다 보는 데 일주일은 걸린 것 같다. 딱히 지루하다거나 재미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너~~무 평이하고 뻔한 맛의 영화여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성공한 한 남자가 갑자기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소홀했던 지난날들을 후회하는… 뭐 뻔한 그런 이야기. 중간중간 다소 오글거리는 연출도 있고, 드라마의 흐름이 갑자기 변하는 지점들이 어색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제 조지 클루니를 보면 자꾸 네스프레소가 떠올라서 영화배우 보단 광고모델
느낌이 난달까…ㅠㅠㅋㅋ)
그리고 또 다른 얘기지만, 조지 클루니의 딸이 아빠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여서 자기와 시간을 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해 굉장히 상처를 받아, 이미 나이가 꽤 먹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에게 극도로 비난적이다. 이 지점에서 <국보>가 떠올랐는데, <국보>에서 기쿠오의 사생아 딸은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국보"라는 예술가로서의 존재는 인정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아버지의 인생을 그 나름대로 수용한다. 반면 제이 켈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인 와중에 <국보>의 주인공보다도 딸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다정했던 것 같고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엄청 지원해주려고 하는데... 정말 뭐 저렇게 배부른 딸이 있나 싶었다(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ㅋ). 아, 역시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있고 인간관계가 제일 어렵다니까.
줄리 & 줄리아 (노라 에프론, 2009)
유명 셰프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의 요리책 524개 레시피를 365일 동안 완성하겠다는 목표로 블로그를 시작한 현대의 주부 줄리(에이미 애덤스)의 이야기와, 파리에서 처음 요리에 눈을 뜨고 열정을 쏟아부은 줄리아의 삶을 교차하며 그려내는 실화 기반의 작품이다.
앞으로 먹고살 일이 막막할 때 보면 약간 위안이 될 만한 영화다. 2009년 작인데, 요즘 인터넷에서 다들 그렇게 떠드는 "블로그를 해야 한다... 뭔가를 해야 한다" 같은 교훈을 주는 영화다. 귀찮긴 한데, 뭐라도 하면 어디서 뭐가 터질지 어떻게 알겠어? 줄리 파웰이 그렇게 365일 동안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 524개 레시피를 완성한 것처럼, 우리도 꾸준히 뭔가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준다. 어쨌든 기승전결은 확실한 영화이니 타임킬링용으로 무난하게 볼 수 있다.
시민 케인 (오슨 웰스, 1941) — 전설적이지만, 시대의 한계는 있다
신문 재벌 찰스 포스터 케인(오슨 웰스)이 신문 재벌이 되기까지의 야심과 추락을 따라가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회상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
이 작품은 교과서에 늘 등장하는, 세기의 명작으로 꼽히는 전설의 영화인데, 마침 왓챠에 올라왔길래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촬영 기법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은 작품이다. 특히 딥 포커스 기법을 혁신적으로 사용해서 화면의 전경과 배경을 동시에 선명하게 표현했고, 이후의 영화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우 앵글 쇼트로 권력관계를 시각화했고, 표현주의적 조명으로 심리 상태를 표현했으며, 비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로 회상과 현재를 오가면서 케인의 삶을 퍼즐처럼 보여주는 방식도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영화사에서 기술적, 미학적으로 큰 획을 그은 작품으로, 이후의 영화들에 크게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보면 뭐 그냥...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흑백영화다. 뭐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쯤이라면 많이 다루어진 한 인물의 영광의 정점과 몰락..) 역사적 가치와 기술적 혁신은 인정하지만, 순수하게 즐기는 영화로서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약간은 지루할 수 있다는 게 솔직한 감상평.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짐 자무시, 2025)
뉴저지, 아일랜드, 파리를 배경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밀을 나누지 못하고, 가깝고도 먼 가족 관계를 그린 세 개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톰 웨이츠, 애덤 드라이버, 케이트 블란쳇 등이 출연한다. 202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올해 영화관에서 본 마지막 영화다. 짐 자무시 영화를 막 엄청 좋아하지는 않아서 약간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딱히 볼만한 다른 영화도 없고 해서 본 건데, 보길 잘했다.
내용은 서구권 영화에서 흔히(!) 다루는 가깝고도 먼 가족 관계를 그린 영화다. 각 에피소드에서는 어른이 된 자녀들과 그들의 부모(들) 사이의 관계를 조용히 관찰한다.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가족이 뭔지... 사실 가장 가까운 관계이지만 종종 서로의 비밀을 제일 터놓을 수도 없는 그런 모순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무시는 그 모순을 억지로 풀려하지 않는다. 그냥 관찰한다.
내용을 떠나, 영화를 보고 뇌리에 남는 이미지는 <커피와 담배>처럼 정적인 오버헤드 샷(위에서 내려다보는 정조준 촬영)으로 세 가족이 모여있는 커피테이블 혹은 티테이블을 찍는 부분이었다. 왠지 반갑고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달까. 그리고 마지막 '시스터 브라더' 에피소드에서 쌍둥이가 등장하는 부분에 삽입된 곡이 특히 좋았는데(사실 이때까지 영화 내에서 각 에피소드 내에서 딱히 음악이 삽입되지 않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사운드트랙은 영화관에서 크게 들어야 그 제대로 된 맛을 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참고로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아래 원곡과 다른데, 영화에서 흐르는 버전은 아래 원곡이다. 개인적으론 원곡이 훨씬 좋다.
올해는 총 174편의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하나 바뀐 습성이 있다면, 예전에는 무조건 "초반에 맞지 않아도 혹.시.모.르.니 일단 시작한 건 무조건 끝까지 보자" 주의였는데, 이제는 초중반부터 내 스타일이 아닐 것 같은 영화는 결국 끝까지도 그렇다는 데이터가 충분히 쌓여서, 이제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런 영화들은 그냥 과감하게 하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이런 중도하차(!)를 시작한 지는 고작 두어 달 전부터다. 처음으로 중도하차한 영화들이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 랑 <러브 미>인데, 전자는 이미 수많은 마약중독 영화에서 다뤄진 너무 익숙한 이미지들이 겹치고 정신 사나워서, 후자는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스티븐 연의 로맨스라 기대했지만 너무 노잼이라... (보면서 중간에 졸다가 깼는데 심지어 무슨 애니메이션 같은 장면이 나오길래 바로 꺼버렸다... 사실 지금 아무런 장면도 기억이 안 난다.)
11월쯤 되어서 막연히 올해의 최고작들은 이미 다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씨너스>, <퀴어> 등...), 12월에도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의외로 기분이 좋았다. 내년 개봉작들도 벌써 몇 편 기대가 되는데, 계속해서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