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 픽션>을 다시 보다

영화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

by HeeHee

나는 타란티노의 영화를 좋아한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타란티노의 영화들이야말로 영화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기능, 그러니까 ‘오락’을 가장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품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순수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 그냥 즐길거리. 그의 영화는 관객을 즐겁게 하는 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타란티노 영화는 “재미있어도 되는 영화”가 아니라, “재미있어야만 하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타란티노의 영화를 볼 때 나는 대체로 편안하다. 무엇을 배워야 할지, 어떤 의미를 건져야 할지,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려놓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펄프 픽션>만큼은 예외였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너무나도 유명하고 아이코닉한 영화. 타란티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반드시 거쳐 갔을 작품인데,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나는 분명 크게 감명받지 못했다. 싫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좋지도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영화 내용에 대한 기억조차 흐릿해졌다. 다만 ‘다들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나는 왜 이 정도지?’라는 애매한 감정만 남았다.


그러다 우연히 아래 영상을 보게 됐고, 패널들이 <펄프 픽션>을 찬양하는 걸 보면서, 이 영화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갑자기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보게 됐다. (분명 그 영상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OTT에서 다 내려간 것 같았는데, 최근에 다시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었다.)

이게 이 글의 시작점이 된 영상! (개인적으로 꽤나 재밌게 봤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든 말든, 이 영화만큼은 제대로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펄프 픽션>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어딘가 찜찜한 일이었다. 이번 재관람에는 큰 기대도, 대단한 분석 의지도 없었다. 그냥 보자, 이 정도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냥 시작부터 재밌었다. 아, 오프닝부터 그 익숙한 음악. 심장이 두근거렸다.

<펄프 픽션>의 오프닝 씬

(그나저나 대체 나는 전에 뭘 본 건지, 햄버거 씬 말고는 제대로 기억나는 씬도 없어서 거의 처음 보는 기분이었다.)

다시 보니 영화 전체가 인상 깊지만, 이 씬은 다시 보기 전에도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찰진 대사들, 예상치 못하지만 기막히게 설계되어 이어지는 장면들. 그냥 영화가 이끄는 대로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다른 타란티노 영화들에서처럼 “그래, 이게 영화지”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의문도 들었다. 과거의 나는 대체 왜 이걸 그렇게 평이하게 보고 지나갔을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펄프 픽션>에 대한 해설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영상을 하나 골라 틀었다.


그 영상은 내가 영화를 보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까지 집요하게 의미를 끌어올려 해석하고 있었다. 감탄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약간의 거리감이 들었다. ‘아, 이런 해석도 가능하구나’보다는 ‘아, 나는 이런 것까지는 생각을 못해봤네’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그리고 아주 잠깐, 자괴감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다. 나는 너무 평면적으로 영화를 본 걸까?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깊이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관객인 걸까? (나처럼 느낀 사람들이 많았는지 댓글도 대부분 그 해석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찬사 일색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한 방식과, 누군가 이 영화를 분석하는 방식은 애초에 다른 차원이라는 것. 그리고 둘 중 어느 한쪽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펄프 픽션>은 관객에게 해석을 요구하는 영화라기보다는, 반응을 요구하는 영화에 가깝다고 느꼈다. 이 영화의 비선형 구조는 퍼즐이 아니라 리듬이고, 대사는 철학이 아니라 타이밍이며, 폭력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만화적인 쾌감에 가깝다. 이해해서 재밌는 영화라기보다는, 이해할 필요가 없어서 재밌는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타란티노 영화들이 떠올랐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는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결말’을 일부러 비틀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마찬가지로, 노예제라는 무거운 배경 위에서 말도 안 되게 통쾌한 복수극을 완성한다. 두 영화 모두 정치적·윤리적인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강하게 작동하는 건 장면의 힘이다. 긴장, 웃음, 폭력, 침묵. 타란티노는 늘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놀게 하는가”에 더 집요한 감독이다.


<펄프 픽션>은 그 성향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난 영화다.


이야기는 해체되어 있고, 인과는 느슨하며, 인물들은 거창한 목적보다는 눈앞의 상황에 반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한 번도 지루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파편성 자체가 하나의 리듬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설명보다 장면으로 기억되고, 의미보다 감각으로 살아남는다.


결국 나는 이 영화를 ‘해석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가장 먼저 ‘반응했을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줄스가 성경 구절을 다시 해석하는 대사든, 정체 모를 금가방이든,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끝까지 다 알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 장면들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펄프 픽션>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너무 깊어서라기보다, 너무 잘 놀아서에 가깝다.


아마도 내가 <펄프 픽션>을 처음 봤을 때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명작으로 불리는지, 무의식적으로 그 이유를 이해하려 집착하느라 정작 ‘재미’를 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그냥 정말 단순히, 무슨 내용이었는지 정도만 다시 확인해 보자는 목적만 가지고 가볍게 본 것인데, 예상외로 너무 재밌었다.


어쩌면 영화를 즐길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 영화에서 뭘 느껴야 하지?’라는 질문 대신 ‘재밌었나?’를 먼저 묻는 편이 더 나은 방향일지도 모르겠다. 몸이 반응했는지, 장면이 남았는지, 다시 보고 싶은 순간이 있는지. 그 기준으로 보면 <펄프 픽션>은 꽤나 강력한 영화다. 그리고 이번 재관람은, 영화를 소비하는 내 태도에서 조금은 힘을 빼도 괜찮다는 걸 일깨워줬다.


결론적으로, <펄프 픽션>은 나에게 어떤 뚜렷한 교훈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왜 애초에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해 주었다. (이 지점에서 데미언 셔젤의 <바빌론>이 떠올랐다. 괜히 또 공부하듯 영화를 보느라 다소 지치던 시절, ‘그냥 즐기려고 영화를 본다’는 감각을 다시 가르쳐줬던 작품.)


아직 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한 영화가 너무 많아서 웬만해서는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보지 않는데, 이번만큼은 꽤 의미 있는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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