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다시 보며

감명에서 감당으로: 영화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재점검한 재관람

by HeeHee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마이크 피기스, 1995)가 재개봉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예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4.5점을 줬다. 분명 감명 깊게 봤다는 기억만 남아 있었고, 이상하게도 영화의 구체적인 장면들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영화였다는 인상만 남고, 구체적인 내용과 이미지들은 어느덧 흐릿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보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에는 버거웠다.


영상미와 음악은 여전히 좋았지만, 평점은 4점으로 조정하게 됐다. 영화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영화의 우울을 이전처럼 받아낼 수 없게 된 듯한 느낌이 더 정확하다. 예전에는 온전히 빠져들 수 있었던 정조가, 지금의 나에게는 삶 바깥의 일이라기보다 삶의 무게와 겹쳐 들어오는 무엇이 되어버렸다.


이 영화의 삶들은 너무 극단적이다. 알코올 중독, 자기 파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동반 추락. 물론 실제로 저런 삶이 존재하겠지만, 화면 속 인물들의 하루하루는 관객에게 거의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감정이 서사로 단단히 정리되지도 않고, 미학이 그 감정을 온전히 완충해 주지도 않는다. 우울은 설명되지 않은 채 그대로 흘러나와 끝으로 치닫고, 관객은 그 상태에 함께 잠겨 있어야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그래서였을까. 영화를 보며 전혀 다른 결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왕가위의 〈중경삼림〉과 〈화양연화〉였다. 두 작품과는 공식적인 연관성도, 제작상의 연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비슷한 감각이 있었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90년대 중반, 도시를 배경으로 한 고독한 개인들. 사랑은 있지만 구원은 없고, 함께 있어도 외롭다. 무엇보다 음악이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감정의 밀도를 끌어올린 채 관객을 그 속에 오래 머물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재즈와 블루스, 반복되는 선율, 되돌아오는 감정의 순환.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도 있다. 왕가위의 영화들은 슬픔을 형식으로 감싼다. 고통은 정제되고, 미학은 관객이 감정을 응시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준다. 반반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우울은 훨씬 더 날것이다. 미장센과 형식은 완충제가 되지 못하고, 삶은 술처럼 흐르며, 인물들은 끝내 스스로를 구조하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예전의 나는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볼 수 있었고, 지금의 나는 “감당하기 어렵다”라고 느끼는 것 같다. 이건 취향의 후퇴라기보다, 감정을 사용하는 방식이 달라진 결과에 가깝다. 예전에는 우울을 통과해 나가는 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우울을 삶 쪽으로 끌어오지 않으려는 일종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이 생겼달까. (지금 내 삶이 더 버거워졌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재관람은 어느 순간 영화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점검이 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우울한 영화를 보며, 역시 인생은 힘들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묘한 위로를 받았다. 고통이 극단적으로 그려질수록, 나의 우울은 상대적으로 정당화되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굳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우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할까. 위로와 공감만으로 충분한 시기를 지나, 이제는 희망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아니면 단순히, 나도 나이를 먹어 이런 날것의 감정에 조금 지친 건지 모르겠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여전히 좋은 영화다. 다만 지금의 나는, 이 영화의 우울을 통해 나를 설득하기보다는 조용히 거리를 두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선택이 가능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좀 괴로웠지만) 이번 재관람은 충분했다.


이 영화의 대표 사운드트랙은 아래의 두 곡, 스팅의 음악이다.

Sting - My One and Only Love
Sting - Angel Eyes

그나저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슈는 참 아름답다. 메이크업과 스타일이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화장을 덜 할수록 묘하게 더 빛난다. (역시 덜어냄의 미학…?)


뜬금없지만, 이번에 보면서 ‘창녀라기엔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고급진데…’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원래는 변호사를 하려고 하버드에 입학했다가 연기를 위해 중도에 그만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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